이제는 분명히 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저지르고 있었다고. 가스라이팅이라고.
이솝우화 이야기 중에 말을 데리고 가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가 앞에서 어떻게 갈지 갈등하던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들이 조언을 남긴다. 말을 타고 가자니 걸리는 부분이 있고, 안 타고 가자니 그것도 애매하다. 여기에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건넨다. '타고 가라.''어떻게 타고 가냐?''그냥 가라.' 사람들의 조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던 그는 결국 엉뚱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그 물을 건넌다. 아주 우스꽝스러워졌다.
언니들은 툭하면 내게 조언이랍시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건넸다. 그러나 그 조언이라는 것이 그저 자기 상식에 기대어 깊은 생각 없이 나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진로를 두고 깊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외고입학시험에서 떨어졌고, 상업계 사진 특성화고가 있었는데, 거기를 갈까 생각했었다. 언니는 내게 '네가 상고에 간다고?'라며 말도 안 된다는 뉘앙스로 얘기했다. 영향을 쉽게 받는 infp-t유형의 나는 그 한마디에 내 생각을 펼치지 못했다.
21살에 이단교회에 빠져 거지 같은 수능점수를 가져왔을 때도 나는 분명 한번 더 수능을 보겠다고 했었다. (기가 죽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을 거다.) 둘째 언니는 삼수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당장 전문대라도 가라고 했다. 이단교회에서 하루 3시간을 목표로 기도하던 나는 어떤 영적인 감이 세졌는지 병적인 초초 민감형으로 누가 내 걱정을 하면 머리가 너무너무 아파왔다. 마음의 말도 못 하는 선택적 함구증을 6세부터 앓아온지라 말도 못 하고, 언니들의 결정에 따르겠다 했다. 나는 당시 저들은 나중에 후회할 거라 속으로 생각했던 거도 같다. 나중에 이를 두고 얘기를 꺼내면 "네가 그때 강하게 얘기하지 않았었어!"라며 나를 나무랐다. 강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들을 귀가 없는 걸까? 기센 언니들 사이에서 선택적 함구증을 갖고 산다는 건 기가 죽어 한숨 쉬는 일 외에 딱히 할 일이 없는 것과 같았다.
언니들에게 등 떠밀려간 전문대에서 2년 정도 다니며 내 진로를 생각해 보다가 다시 전문대 일러스트학과 등을 가려는 생각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이에 큰언니는 "전문대를 나오고 또 전문대를 간다고?" 나의 의견은 또 한 번 묵살되고 말았다. 그녀의 논리에 따라 그녀가 그토록 선망하는 4년제를 가야 하는 것이었다.그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보다자기들 논리에 따라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게 더 중요했을 거다.
왜 그토록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은 없고, 자기들 생각에 기대어 막말하는 인간들만 있었을까. 난 내 목소리를 잃은 채 그들의 목소리에 장단을 맞추다 저 우스꽝스러운 이솝우화의 주인공처럼 된 것이다.
부모님은 기센 언니들에게 의존했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인생을 두고, 언니들의 결정에 따랐다. 나와 원래 대화가 없었다. 어릴 때도 옛날 방식으로 언니들이 동생을 챙겨주기를 바라셨다. 불행하게도 도시의 방 한켠에서 유아기 3년 동안 벽만 보며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나는 의존성 성격장애 성향으로 성장했고, 관계에서 기본적인 대처능력조차 부족했다.아버지가 기대한 것처럼 그의 어릴 적 시골에서의 방식대로 성장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결혼을 할 때도 아빠는 언니들에게 내 남자친구를 만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거의 백수와 다름없던 나를 두고 "얘 일 안 하는데 괜찮냐" 등등의 질문을 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남자친구집에 돈이 없는 것 같다는 둥 '내가사는 부모님 명의의 집에서 살려는 거 아니냐', '집만 보고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 등등 막말을 해댔다.깜짝 놀란 나는'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생각을 내비쳤고, 그에 언니는 "말도 못 하냐?"라고 퉁치고 넘어갈 뿐이었다. '말이면 다인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밤새 엄마와 떠드는 언니 목소리에 나는 그날 잠을 못 잤다.
언니들에게는 결혼 전에 남자 친구 집에서 집을 해와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는데,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던 그 언니들과의 단톡 방을 나와버렸다. 32살에 명상을 배워 더 이상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힘을 배운 덕이었다.
그러고는 한 번씩 툭툭 내뱄었다. "네가 알아서 결정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기요. 제가 뭐 물어본 적 없었는데요?' 결혼할 때 분명히 알겠더라. 기센 언니들은 나의 경계선을 함부로 침범하고 있었다.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의 상식에 기대어 수도 없이 조언을 하려고 이런저런 말들로 나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말 많은 둘째 언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입방아를 찧는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6살 때부터소아우울증, 불안장애등이 방치된 채 자란 탓에 그거에 대응할 어떤 기본적인 대처능력도 없이 조종되었던 것이다.
다 너를 위한 거야 동생이니까 얘기해 주는 거야 남이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아
함부로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경향, 그들의 애정결핍에서 나온 말과 행동들. 기센 언니들의 가스라이팅.
그들의 가스라이팅은 그들이 각자 가정을 꾸리며 조카들에게 서서히 옮겨갔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큰언니는 아직도 내 4년제 대학 등록금을 해주려고 아빠가 애쓰신 얘기를 하며 나에게 고마워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준다. '여보세요.당신들이 등 떠밀어 편입을 한다고 간 전문대에서부터 첫 단추가 엉망으로 되었던 걸 아시나요? 당신들의 결정에 아버지가 의지한 탓이었던 거 같은데. 그게 정말 나를 위한 일이었을까요?'
이렇게 쓰면서도 여전히 나는 부모님께, 언니들에게 죄송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불안장애와그로 인한조용한 adhd성향만 없었어도(adhd도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생기는 거라고 한다.)어떻게든 언니들과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은행에라도 취직할 수 있었으면, 아니 사회생활만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비슷한 금융계에서 버티다가 갑상선 항진증이라는 병만 얻었다. 내 몸이 아프다고 신호를 주는데도 가족들은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문제아를 바라보듯 했다. 내가 adhd성향의 어려움을 얘기해도 큰 언니조차 "그거 다 낫지 않았냐?""공기업 준비하는 게 어때?"생각 없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내 어려움을 이해해 줄 사람은 십몇 년이 지나 유튜브를 통해 만난 오은영 박사님밖에 없었다.
대부분 가스라이팅 경험자들이 느끼듯 원가정에서 조금이라도 내 마음이 비추어졌을 때 돌아오는 말은,
"네 기억이 잘 못된 거야", "너 말이 되게 이상하다.", "너 너무 예민해", "도대체 왜 그러니?" 등의 반응이었기에 안 그래도 마음의 말을 못 하는 6살 때부터의 선택적 함구증은 계속 실망하고 상처받으며 더더욱 마음을 닫았다. 그리고 나 조차도 내가 문제가 정말 심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명상과 마음공부, 안정적 애착유형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알았다. 내가 아닌 지나치게 선을 넘는 그들이 문제였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목소리를 듣지 않고 내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한다며, 나를 위한다며 하던 그 사랑에 응답하다가 나의 성향을 무시했다.그들이 준 수치심은자기 학대로 변하여 자가면역질환으로 번졌다. 이제는 분명히 하고 싶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저지르고 있었다고. 가스라이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