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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로드 Sep 16. 2023

나의 '부모와 절연'스토리

친정만 가면 정신병자가 된다(나의 자가면역질환 치유기#2)

나는 한 번씩 '사랑한다'는 그 말이 싫다.
사랑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불안정 애착의 사랑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지옥 같은 세상을 줄 뿐이다.



유년기의 정서적 방임을 겪은 사람들 대부분은 이 같은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는 철저히 숨기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정신과 의사 또는 심리 상담사를 찾아간다. 이들은 대부분 깊은 자책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자기감정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감정인데도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외로움의 해부학, 틸스완


내 인생의 문제를 알지 못한 채 기나긴 방황을 하던 나는 집에서는 그저 천하에 바보 멍청이일 뿐이었다. 언니들은 쳐다도 못 보던 사립대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취업도 못하고 있었고 연애는커녕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을 받을 줄도, 주는 것도 어색했다. 나는 깊은 자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심리상담사를 찾았다. 그러나 거금을 들일 수 없어 무료로 하는 곳을 알아보다가 시간만 버렸다. 나중에 열심히 검색을 하여 간 곳에서 조금씩 해결의 조짐을 발견했다.


명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심리학을 파다 보니 이 모든 문제가 유년기의 '방임' '정서적 학대'에서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주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평생 눈물도 안 나오던 메마른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상처받은 자아는 감정을 느끼면 너무 아프기에 아예 느끼지 않으려고 수년동안 감정을 깊이 억눌러왔던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만나면 만날 수록 더 깊이 아왔다. 그 아이는 소아우울증만 있는 줄 알았는데, 몇 년 뒤에 보니 소아 무기력증이 있었고, 또 나중에 보니 불안장애가 있었다. 벌벌 떨던 아이, 혼자 버려진 아이, 불안으로 인해 말을 잃은 아이 세상을 향한 믿음을 잃은 채 초점 없는 눈동자로 어른아이처럼 살아가게 된다.


명상을 하기 전의 나는 그저 말없이 무능하고 감정이 없는 인간이었다. 명상을 배운 후, 조금씩 내 불안을 다룰 줄 알게 되었 동시에 수년간 억눌러왔던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정신병자가 되어 갔다. 혼자 있으면 엉엉 울면 되었지만, 주변에 누구라도 있으면 안 되었다. 지만 감정을 느껴주는 것이 무의식정화의 핵심임을 알고 있기에 최대한 감정이 이끄는 대로 느껴주려고 했다.

기억하는 나의 5살 어린아이는 혼자 상상놀이를 한다며, 학교에서 혼나는 상상을 하며 옷을 다 벗고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었다. 이 아이가 금쪽상담소에 발견이 되었다면 이런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 집안 분위기가 굉장히 침울하고,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들로 인해 불안함을 느끼고 있고, 그 모든 게 자기 잘못인 줄 알고 죄책감을 느껴 나온 행동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에너지를 다 빼앗겨 소아우울증, 무기력증이 보이고요......"


제 때에 치료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는 청소년우울증에 이어 성인우울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몇십 년을 원인도 모르고 자책에 빠 살 나였다. 가족들은 쩡한 겉모습만 보고, 사회생활을 못하는 나를 두고 모두 못났다며 무시했고 걱정이랍시고 깊은 수치심을 주었다.


틸스완의 책을 읽으며, 또 명상을 하며, 나는 정신병자 같지만 늘 내 감정 마주하는 것에 용기를 가져야 했다. 아프지만 만나주어야 했고, 그러면서 점점 치유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는 중에 본가에 가면 어린 시절의 내가 더 크게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다.


남자 친구가 세종에 와서 언니들을 만나던 날, 본가에 가면 또 어린 시절이 떠올라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남자 친구와 같이 자취집으로 내려오려는데, 아빠가 당연히 본가로 와서 자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날 밤에 언니와 엄마는 밤새 이야기했고, 나는 그 소리에 잠을 못 잤다. "내가 살고 있는 부모님 명의의 안양집으로 들어오려는 거 아니냐, 내가 집이 있는 걸 보고 좋아하는 거 아니냐..." 안 그래도 본가는 마음이 불편해 쉽사리 잠이 들 수 없었는데, 그들의 수다에 더욱 잠에 들기 어려웠다. 다음 날 나도 모르게 복받치는 감정이 올라왔다. "언니들 말만 듣지? 어릴 때 어린애를 어떻게 그리 둘 수가 있어? 어떻?" 아마 그때 나는 눈이 뒤집혔던 거 같다.


그에 49년생 김종표 내가 정신병자라고 확신했던 거 같다.

 "고아원보다는 낫지 않았느냐, 너 같은 딸 필요 없다. 나가라."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드는 생각은 '진작 좀 그리하지.' 차라리 고아원이 낫다고 생각할 때 많았다. 적어도 거기는 친구가 있었다. 유아기 3년 동안 벽만 보며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다 바보가 되는 것보다, 밤만 되면 그 전쟁 같은 싸움을 보는 것보다 고아원이 나았을 거라 생각하곤 했다.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독일고모가 달랬다는데 줘버리지. 아들 아니라서 실망했으면서 쓸데없이 고집부리다 양육책임의 부분을 언니들에게 지했다.(언니들이 지나치게 선을 넘기도 했지만) 수치심이 핵심감정나르시시스트 성향의 아버지는 자라면서 자신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삼으려고 굳이 나를 잡아 두었나 보다. 과 몇 달 전에도 그의 문자를 받은 날 밤에 가위에 눌렸다. 악몽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학대도 사랑이라더라.


나는 한 번씩 '사랑한다'는 그 말이 싫다. 사랑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불안정 애착의 사랑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지옥 같은 세상을 줄 뿐이다.


지난번 정이 불편하고 힘들다는 얘기로 거리를 두려 하자 엄마는 "다 잊어버려라. 나도 힘들었다."며 운을 떼었다. 시누들, 시집살이가 힘겨웠고 시누이들과는 끝끝내 절교를 했다는 엄마. 당신이 시누이들과 절교하고 평화를 찾았듯 나는 당신들과 절연을 해야만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걸 설명해야만 했다. 수도 없이 울었지만 그래도 부모님 고생한 것을 알기에 모진 말은 하지 않으려고 꾹꾹 참았다. 그러나 결국 터져버렸다. 그러고 나서도 자책감과 내면의 갈등으로 인해 탈모증상이 오기도 했다. 결국 연락을 하지 않고 있고 날이 갈수록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다.


친정에서 나고 자라며 4살 이후, 정신병을 늘 달고 살아왔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정신은 메마르고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화분에 필요한 햇빛과 물을 지원받지 못해 말라 비틀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명상과 심리학에 대한 이해, 안정적 애착유형의 남편으로 인해 40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를 펴고 내 마음의 말을 하게 된 나.


결혼했으니 이제 철들어 효도할 거라 기대했던 엄마는 그간의 내 어려움을 조금도 몰랐기에,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에, 서운하기만 할 법도 하다.


그러 나는 과거의 나를 돌보기에도 벅차다. 어린 시절 상처치유를 넘어 태아 때의 상처치유까지도 해야 했다. 태아인 나의 엄마되어 명상을 하다 보니 친정엄마의 존재는 생물학적엄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더라. 그녀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 그저 바보를 만들어 놓고, 바보라 흉을 보던 무지한 어른이었을 뿐이다.


  서로 이해불가의 관계. 사회에서 만났다면 굳이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은 사이. 근 40년 가까이의 견뎌냄으로 이 인연이 정리되었다면 그저 내게 '수고했다 잘 버텼다' 얘기해주고 싶다. 친정엄마의 서운함은 당신 스스로 잘 다독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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