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빌로드 Sep 14. 2023

친정과 다른 시댁

무의식 정화 후 (자가면역질환치유#1)

8살의 생일이 기억이 난다. 엄마는 집안일을 다루고 있었고 아빠는 식사를 하고 있었던 거 같다. 53년생 이하정 여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미역국 먹어라." 한 마


그날 친구네 집에 갔다가 상에서 친구네 할머니와 보리빵을 먹는 와중에 "오늘 제 생일이에요" 말하며 울컥했었다. 한 번도 생일다운 축하를 받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었으리라. 할머니는 "어머 오늘 생일이니? 이거 먹어라." 하시면서 보리빵을 주시는데 그게 그렇게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한 번씩 시골에 갔던 기억이 있지만 친할머니는 그리 정이 있는 분이 아니셨던 거 같다. 그런 따뜻한 기억이 없다. 그냥 사촌 남자형제들만 좋아하셨던 것 같다. 나의 8살 생일 하면 그 당시 친구 할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떠올라 살아계신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어머니가 끓여주신 미역국은 도대체가 무슨 의미인지 마음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따뜻한 국이었을 텐데도 전혀 따스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무의식 정화 후 만난 남편, 그리고 시댁은 친정과는 많이 달랐다. 시골에서 가난하게 자랐다는데 정서적으로는 안정적인 남편은 위로 누나와 형이 있다. 사춘기 때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면, "네가 알아서 해"했을 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내가 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을 얘기하면 남편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데, 너무 쉽게 그 선을 넘는다."라고 말했다. 건강한 경계라는 심리학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남편 위로 10살 연상의 형이 있는데, 50대가 된 부부에게 아이는 없다. 어머니는 그에 대해 어떤 서운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남편 말에 의하면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안 좋아고 한다. 오히려 형님과 사이가 좋으시다. "나는 그 애가 좋더라."라며 웃으며 말씀하셨다. 님의 친정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안아주시며 "엄마라고 불러라"라고 하셨단다. 나에게도 "너는 왜 엄마라고 안 하니?"라며 웃으며 부드럽게 말씀하신 적도 있다.


남편과 결혼한 지 3차에 이르는데 나는 그동안 전화 한 번 드린 게 다이다. 초반에 통화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남편 통화 끝에 인사드렸지만, 시골어르신의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한 탓인지 어색하기만 했다. 어머니도 어색하셨던 걸까? 그 뒤로 2년 넘게 한 번도 전화를 드리지 않았지만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어쩌다 시골집에 가면 그렇게도 따스한 미소와 따뜻한 눈빛으로 받아주실 수가 없다. '왔니? 너희를 보아서 너무 기쁘다.'라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신을 챙기는 거에 대해서도 부담이 없다. 어제도 "생신 안 챙겨드려도 돼?"라고 남편에게 물으니, 형이랑 누나가 챙겨서 괜찮단다. 생일을 그렇게 꼭 챙겨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으신단다. 지난번에 용돈을 드리려고 하는데 한사코 거절하셨다. "아니다. 나 받았다."라며 봉투를 밀어내셨다. 너희 청약하고 대출값는거 뻔히 아는데, 남편에게 주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단다.


반면 친정집에서는 1주일, 2주일에 한 번은 연락을 하는게 습관이 되어있다. 시댁에 전화드리지 않는 거에 대해 평가를 하며 연락드리라고 명령조로 말씀하신다. (엄마, 아빠 따로따로 연락을 바라는 거 같아 그 조차도 스트레스였다.) 지난번 명절에는 용돈을 드렸는데, 당시 엄마의 실망스러운 표정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에게? 이거밖에 안 줘?'라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30만 원을 넣었는데 내가 거기서 5만 원짜리 두장을 꺼내어 조카들 용돈을 주었다. 사실 엄마에게 생긴 적대감에 그다지 정성 쏟고 싶지 않아 은행에서 돈 못 뺐다는 핑계로 대충 드린 거다. 동네 할머니들이랑 비교하며 누구네 집은 50만 원 주네 어쩌네 하던 엄마. 나는 받은 게 없다고 느끼는 거 같다. 나를 유아기 3년 동안 방치하고, 밤에는 전쟁같은 싸움을 보느라 불안장애 및 갖가지 심리적 어려움에 몇 십년을 고생한 나를 오히려 멍청하다며 몰아붙이고, 무시하던 사람이다. 대충 키웠으면서 바라는 게 많은거 같다고 여겼다. 그래도 서운하신 거 같아  으로 돌아와 택배선물 하나 더 챙겨드렸다. 여전히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더불어 효도를 하는 게 당연하다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다. (부모의 영향 때문에 죽고 싶던 자식의 심정은 모르실 거다.)


어릴 때 트라우마와 성인이 되어서도 공감과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친정집을 떠나는 건 내 평생의 소원이었다. 늘 집을 나오려고 했지만, 어린시절 생긴 불안장애로 인해 늘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31살 즈음 치유를 위한 명상을 시작하고 조금씩 가능해졌다. 최근 그간 하지 못한 말들을 메시로 남겼다.

"나 친정 가는 거 불편해. 가기 싫어. 거기서 살면서 마음이 편안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5살 애 앞에서 싸우면 무서워서 마음의 말을 못 하는 병에 걸렸던 건데, 그걸 모르고 대충 키운 거야. 루푸스는 마음의 병이 깊은 거야. 지난번에도 세종 갈 때 얼굴이 더 울긋불긋 올라왔어."


정서적 거리를 두려고 했던 나의 그 메시지 이후 무언가 잘못했다고 느꼈는지 더욱 자주 전화를 해댔다. 친정엄마의 땍땍거리는 말투를 들으니 입덧이 더 심해다. 어지럽고 매스껍고 설사까지 했다. 친정에서의 일들이 떠올라 매우 괴로워졌다. 한 번은 걸을 수 조차 없었고, 남편에게 짜증을 내는 나를 발견하고는 더 긴 장문의 메시지로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했다. '자주 통화 안 했으면 좋겠어.'라고 시작하며 그간 쌓여왔던 말들을 했다. 비로소 연락도 안 할 거라는 아빠의 말을 들었다. 이제 연락도 안 한다니 너무 좋다. 평온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내가 자가면역질환치유를 위한 무의식정화를 하기 위해 그간 가장 많이 의지해 왔던 명상은 '건강한 경계명상'이다. 나는 의존성성격장애로 건강한 경계를 세울 줄 몰랐으니까 그 점이 가장 취약했다. 해외사이트에서 명상파일을 구매해서 혼자 수도 없이했다. 그리고 나의 버전으로 다시 각색하여 명상파일을 만들었다. 명상을 통해 스스로 평온함을 찾고, 혼자 설 단단한 내면의 힘이 생겼다. 그리고 내가 가진 건강한 에너지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리라. (그전에는 언어폭력을 일삼는 상대가 내 인생에 끌려온 적도 있다.) 내 삶이 보여주는 현실을 보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내 주변환경이 건강해지면서 점차 스트레스가 줄고 면역억제제, 듀록정 약을 먹지 않아도 정상수치를 유지하게 된다.


https://youtu.be/bzleqE1yXwQ?si=Xb-a9bZmM48msX4q



 

이전 12화 권위 잃은 부모와 기센 언니들의 가스라이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