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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로드 Sep 13. 2023

권위 잃은 부모와 기센 언니들의 가스라이팅

무너진 경계선(나의 자가면역질환 원인#8)

이제는 분명히 하고 싶다.
사랑이라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저지르고 있었다고. 가스라이팅이라고.


이솝우화 이야기 중에 말을 데리고 가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가 앞에서 어떻게 갈지 갈등하던 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들이 조언을 남긴다. 말을 타고 가자니 걸리는 부분이 있고, 안 타고 가자니 그것도 애매하다. 여기에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건넨다. '타고 가라.' '어떻게 타고 가냐?' '그냥 가라.' 사람들의 조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던 그는 결국 엉뚱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그 물을 건넌다. 아주 우스꽝스러워졌다.


언니들은 툭하면 내게 조언이랍시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건넸다. 그러나 그 조언이라는 것이 그저 자기 상식에 기대어 깊은 생각 없이 나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진로를 두고 깊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외고입학시험에서 떨어졌고, 상업계 사진 특성화고가 있었는데, 거기를 갈까 생각했었다. 언니는 내게 '네가 상고에 간다고?'라며 말도 안 된다는 뉘앙스로 얘기했다. 영향을 쉽게 받는 infp-t유형의 나는 그 한마디에 내 생각을 펼치지 못했다.


21살에 이단교회에 빠져 거지 같은 수능점수를 가져왔을 때도 나는 분명 한 번 더 수능을 보겠다고 했었다. (기가 죽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을 거다.) 둘째 언니는 삼수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당장 전문대라도 가라고 했다. 이단교회에서 하루 3시간을 목표로 기도하던 나는 어떤 영적인 감이 세졌는지 병적인 초초 민감형으로 누가 내 걱정을 하면 머리가 너무너무 아파왔다. 마음의 말도 못 하는 선택적 함구증을 6세부터 앓아온지라 말도 못 하고, 언니들의 결정에 따르겠다 했다. 나는 당시 저들은 나중에 후회할 거라 속으로 생각했던 거 같다. 나중에 이를 두고 얘기를 꺼내면 "네가 그때 강하게 얘기하지 않았었어!"라며 나를 나무랐다. 강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들을 귀 없는 걸까? 기센 언니들 사이에서 선택적 함구증을 갖고 산다는 건 기가 죽어 한숨 쉬는 일 외에 딱히 할 일이 없는 것과 같았다.


언니들에게 등 떠밀려간 전문대에서 2년 정도 다니며 내 진로를 생각해 보다가 다시 전문대 일러스트학과 등을 가려는 생각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이에 큰언니는 "전문대를 나오고 또 전문를 간다고?" 나의 의견은 또 한 번 묵살되고 말았다. 그녀의 논리에 따라 그녀가 그토록 선망하는 4년제를 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라는 사람 어떤 마음인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보다 자기들 논리에 따라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게 더 중요했을 거다.


왜 그토록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은 없고, 자기들 생각에 기대어 막말하는 인간들만 있었을까. 난 내 목소리를 잃은 채 그들의 목소리에 장단을 맞추다 저 우스꽝스러운 이솝우화의 주인공처럼 된 것이다.


부모님은 기센 언니들에게 의존했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인생을 두고, 언니들의 결정에 따랐다. 나와 원래 대화가 없었다. 어릴 때도 옛날 방식으로 언니들이 동생을 챙겨주기를 바라셨다. 불행하게도 도시의 방 한켠에서 유아기 3년 동안 벽만 보며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나는 의존성 성격장애 성향으로 성장했고, 관계에서 기본적인 대처능력조차 부족했다. 아버지 기대한 것처럼 그의 어릴 적 시골에서의 방식대로 성장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결혼을 할 때도 아빠는 언니들에게 내 남자친구를 만나라고 지시했다. 당시 거의 백수와 다름없던 나를 두고 "얘 일 안 하는데 괜찮냐" 등등의 질문을 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남자친구집에 돈이 없는 것 같다는 둥 '내가 사는 부모님 명의의 집에서 살려는 거 아니냐', '보고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 등등 막말을 해댔다. 깜짝 놀란 나는'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생각을 내비쳤고, 그에 언니는 "말도 못 하냐?"라고 퉁치고 넘어갈 뿐이었다. '말이면 다인가?'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밤새 엄마와 떠드는 언니 목소리에 나는 그날 잠을 못 잤다.


언니들에게는 결혼 전에 남자 친구 집에서 집을 해와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는데,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던 그 언니들과의 단톡 방을 나와버렸다. 32살에 명상을 배워 더 이상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힘을 배운 덕이었다.


그러고는 한 번씩 툭툭 내뱄었다. "네가 알아서 결정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기요. 제가 뭐 물어본 적 없었는데요?' 결혼할 때 분명히 알겠더라. 기센 언니들은 나의 경계선을 함부로 침범하고 있었다.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의 상식에 기대 수도 없이 조언을 하려고 이런저런 말들로 나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말 많은 둘째 언니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쩌라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입방아를 찧는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6살 때부터 소아우울증, 불안장애등이 방치된 채 자란 탓에 그거에 대응할 어떤 기본적인 대처능력도 없이 조종되었 것이다.


다 너를 위한 거야
동생이니까 얘기해 주는 거야
남이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아


함부로 통제하고 간섭하려는 경향, 그들의 애정결핍에서 나온 말과 행동들. 센 언니들의 가스라이팅.


그들의 가스라이팅은 그들이 각자 가정을 꾸리며 조카들에게 서서히 옮겨갔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큰언니는 아직도 4년제 대학 등록금해주려고 아빠가 애쓰신 얘기를 하며 나에게 고마워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준다. '여보세요. 당신들이 등 떠밀어 편입을 한다고 간 전문대에서부터 첫 단추가 엉망으로 되었던 걸 아시나요? 당신들 결정에 아버지가 의지한 탓이었던 거 같은데. 그게 정말 나를 위한 일이었을까요?'


게 쓰면서도 여전히 나는 부모님께, 언니들에게 죄송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없는  아니다. 내가 안장애와 그로 인한 조용한 adhd성향만 없었어도(adhd도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생기는 거라고 한다.) 어떻게든 언니들과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은에라도 취할 수 있었으면, 아니 사회생활만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비한 금융계에서 버티다가 갑상선 항진증이라는 병만 얻었다. 내 몸이 아프다고 신호를 주는데도 가족들은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문제아를 바라보듯 했다. 내가 adhd성향의 어려움을 얘기해도 큰 언니조차 "그거 다 낫지 않았냐?" "공기업 준비하는 게 어때?"생각 없이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내 어려움을 이해해 줄 사람은 십몇 년이 지나 유튜브를 통해 만난 오은영 박사님밖에 없었다.


대부분 가스라이팅 경험자들이 느끼듯 원가정에서 조금이라도 내 마음 비추어졌을 때 돌아오는 말은,

"네 기억이 잘 못된 거야", "너 말이 되게 이상하다.", "너 너무 예민해", "도대체 왜 그러니?" 등의 반응이었기에 안 그래도 마음의 말을 못 하는 6살 때부터의 선택적 함구증은 계속 실망하고 상처받으며 더더욱 마음을 닫았다. 그리고 나 조차도 내가 문제가 정말 심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명상과 마음공부, 안정적 애착유형의 남자친구를 만나고 알았다. 내가 아닌 지나치게 선을 넘는 그들이 문제였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목소리를 듣지 않고 내 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한다며, 나를 위한다며 하던 그 사랑에 응답하다가 나의 성향을 무시다. 그들이 준 수치심은  학대 변하 자가면역질환로 번졌. 이제는 분명히 하고 싶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저지르고 있었다고. 가스라이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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