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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환 Apr 01. 2023

도움의 의미

삶은 절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씩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릴 땐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에다가 길들여지지 않은 능력 탓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이곳저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자라야만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 성장에 꼭 필요한 칼슘이 담긴 우유를 먹이듯이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성장에 필수적인 도움을 먹고 자라 성인이 된다.  그러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즉 자신의 능력 밖의 무언가를 도움을 받아 쟁취해 내는 재미에 푹 빠져드는 몇몇 어린아이들은 그렇게 여기저기에서 도움만 받고 자라서 성인이 되면 아직도 어릴 적 자신이 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든 제약이 똑같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응석받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부모들은 이러한 재앙과도 같은 상황을 방지하고자 도움을 주어야 할 때와 주지 않아야 할 때를 분명히 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도움의 특성은 성인이라면 뭐든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해 나가야 한다는 관념 엇비슷한 것을 만든다. 하지만 우리 성인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무리 성숙해도 개인 능력 밖의 문제들은 득실득실하다. 찾으면 어디에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움을 주어야만 하고,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최근에 도움을 줄 일이 한 번 있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야심 차게 시작한 일들에 조금씩 치이고 피곤해하면서 몽롱한 기분으로 침대 위에 누워서 빨래가 다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복도에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복도 저만치 서서 작게 속삭여도 어느 정도는 다 들릴만한 수준의 방음이었기에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저녁 10시 40분 즈음이었다. 


“늦은 시간에 뭘 하는 거야… 신경 쓰이게" 


부스럭 거리는 소음이 잠깐 멈추더니 곧이어 멀리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 똑똑…”

“뭐지…”


몽롱하던 정신이 완전히 명료해진 건 몇 초 뒤 정확히 내 방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난 후였다. 


나는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몸을 벌떡 일으킨 후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산발의 머리를 대충 올려 집게핀으로 고정한 머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옆집 이웃 여자였다.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엉거주춤하게 앞으로 접힌 허리와 어색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억지웃음을 짓는 입꼬리가 분명 무언가를 부탁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왔다. 왼손에는 도어록 캡과 AA 건전지 한 개가 손에 들려있었다. 


저기… 혹시 카드 있으신가요?
... 네?
아, 제 방 문이 잠겨서 그러는데… 혹시 카드…
...?


나는 방문을 열 수 있는 출입카드를 묻는 줄 알았다. 여기가 아파트도 아니고, 입주자 전용 카드키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카드 따위는 받은 적이 없었기에 연신 카드를 찾아대는 눈앞의 가장 가깝지만 목소리조차 처음 들어 봤을 정도로 멀게 지내던 이웃의 말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문을 여는 카드가 있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네… 카드가 아니어도 카드 비슷하게 생긴 거라도…
'아…!'


난 그제야 그녀가 말하는 카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의 도어록들은 모두 터치식 도어록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패드형과 달리 버튼이 없기에 고장 위험이 적고 소음도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잠겨있는 상태에서 방전이 되면 문을 열 수 없게 되어버리게 된다. 볼일을 다 본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려 도어록을 더듬었을 터였지만, 닫힌 채로 방전되어 버린 도어록이 그녀를 매몰차게 외면했을 터였다. 도어록 캡과 건전지를 손에 든 채로 이런 상황을 맞은 것을 보아 도어록이 방전이 될걸 알고 교체를 하려던 과정에서 생긴 실수 같았다. 


난 우선 지갑을 집어 든 후 주민등록증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음대로 엉켜있는 그녀 머리만큼 혼란스러워 보이던 그녀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부품들을 전부 내게 건넸고, 난 엉겁결에 그것들을 받아 든 채로 그녀 옆에 서서 문제 해결의 여정에 함께하게 되었다.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택도 없었다. 주민등록증으로 열릴 도어록이었으면 설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당혹스러운지 일단 조막조막 한탄부터 하고 본다. 


제가 지금 휴대폰이 안에 있어서… 평소에 닫아도 잘 잠기지도 않던 게 이제 와서 잠기네. 허, 참… 
아 죄송해요, 제가 회식을 하다가 와서…


… 어림잡아 이런 상황 설명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비몽사몽이었지만, 이렇게 된 거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더라면 나 역시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장 해결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기에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본 것도 아니어서 간단명료한 묘수도 없었다. 그래서 직관적으로 접근해 봤다. 복도로 난 창문으로 들어갈 수는 있는지 물어봤다.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이 싹 걷히더니 그녀는 창문으로 달려가 창틀을 이리저리 만지고 들어보더니 금세 다시 돌아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창문을 안 열어놨었나…?


여러모로 정신없는 여인이었다.


직관적인 해결법이 먹히지 않자, 휴대폰이 없는 이웃 대신 구글에 접속해서 도어록이 잠겼을 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수없이 쏟아지는 도어록 잠금 해제 방법에 관한 글들 중 터치식 도어록에 적용 가능한 해결방법을 서술한 글을 찾았다. 방전된 터치형 도어록은 9 볼트 건전지를 맞대어 일시적으로 전원을 공급시킬 수 있다는 글이었다. 그래도 인터넷에 나온 글 하나만 믿고 편의점까지 가서 건전지를 사 올 수고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전문가를 초빙하기로 결심, 집에서 가장 가까운 24시 출장열쇠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우리의 전문가께서도 방금 내가 글에서 읽은 방법을 그대로 읊는 것이었다. 9 볼트 건전지를 들고 도어록의 금속 부분에 대고 있으면 전류가 흘러 방전된 도어록에 전원이 일시적으로 공급될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말 놀랐던 것이, 우선 이런 사소하지만 발생한다면 정말 골치 아픈 도어록 문제에 대비하여 전문 인력이 24시간 동안 서울 수없이 많은 곳곳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런 금전적인 대가 없이 해결책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었다. 미국 같았으면 스펀지밥의 집게사장 마냥 계산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눈이 달러기호가 돼서 집으로 달려오는 무능한 기사들 뿐이었을 것이다 (사실 잠긴 도어록을 열어주는 기사가 따로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출처: https://youtu.be/ZEusnMs5vcM

일단 해결책을 찾았으니, 9 볼트 건전지를 구하기만 하면 되었다. 휴대폰 챙길 겨를도 없던 사람이 어찌 지갑을 가지고 있었으랴. 이웃에게 줄 돈을 찾으러 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웃은 열린 내 현관문을 잡고 “잠시만요"를 속삭이듯 읊더니 내 도어록 캡을 떼어내고서는 촘촘히 박힌 네 개의 AA 배터리 중 두 개를 쏙 빼서는 자기 방 문 도어록의 금속 부분에 갖다 대기 시작했다. 매정하게도 도어록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도 못 마주치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랑 같이 편의점 좀 가주실 수 있나요…?
(현금을 꺼내며) 여기 돈 드릴게요. 이걸로 사세요.
아유… 네… 어후… 갔다 올게요…


내 지갑에 있는 현금의 전부였던 팔천 원을 건네주자 그녀는 미안한 건지, 고마운 건지, 늦은 시간 이렇게 신세를 져도 괜찮은 건가 싶은 의구심인 건지 모를 복잡 미묘한 반응을 보이면서 예의 그 엉거주춤한 몸짓을 하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뒤, 닫힌 현관문 뒤에서 나의 잠을 깨웠던 그 둔탁한 소리들이 다시 들려왔다. 기계음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전원 공급을 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근데 기계음 소리만 나고 버튼을 누르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뒤이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나가서 도와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데,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이웃이 문 여는 걸 도와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격에 젖은 채 그녀는 “오! 감사합니다!”를 외쳤고, 그 소리를 듣자 나도 모르게 내 문제가 해결된 것 마냥 안도감을 느꼈다. 


몇 분 뒤, 내 방문에 힘찬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불쑥 나왔다. 


여기 천 원인데요, 처음에 얼마를 주셨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아… 뭐 그냥 가지세요~ 건전지도 사셨으니…


내 말을 듣자 그녀는 내가 처음 돈을 건넬 때와 똑같은 “아유" “네" “어후"를 몇 번 내뱉더니 “제가… 보내드릴게요… 아까는 문이 잠겨서… 너무 당황스러웠어서…”라며 알 수 없는 구조의 문장을 남기곤 문을 연 채로 엉거주춤하게 방으로 들어가길래 역시 정신이 없는 것 같아 안 보내도 된다고 한 번 더 말하곤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돈을 받지 않은 이유는 대가 없이 도움을 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애초에 돈을 건넬 때부터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게 도움이라고 믿었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완전함의 농도는 옅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안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수를 한다. 실수에 대한 책임은 가끔 너무 무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주변에서 도움을 찾는다. 그렇게 해서 찾은 도움은 또 다른 불완전함을 품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불완전이 낳은 결함을 또 다른 불완전이 돕는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완전함을 추구한다. 어쩌면 도움의 의미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수용하여 삶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하는 노력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나 자신의 결함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태도이자 그 결함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다. 이 경험을 통해 도움의 의미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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