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좋아한다. 참 좋아한다. 맹목적일 정도로 사람을 좋아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준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렇게까지 정성을 다할 필요가 없다고 누군가가 말릴 정도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사람 좋아하는' 이 마음이 날 희생시키기도 한다. 사람을 좋아하는만큼 사람에게서 받는 감정에도 민감해지고 민감해지는만큼 멀어지는 것에는 영 쑥맥이 되어버린 채 계속 끌려다니는 나를 발견했다.
누구나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한다.
누구나 사람을 곁에 두고 곁을 물린다.
누구나 사람을 아끼다.... 버린다... 버려진다...
누구나.. 정말 누구나... 그런... 건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끝까지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지켜야지 하면서도 나 역시 그렇게 마음을 닫았다.
'교수님, 현실은 안 그래요. 9개 주다가 1개 안주면 그걸로 헐뜯는 게 사람이예요.'
왜 뒷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드냐는 내 말에 그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런 게 사람이라지만 다들 그러더라도 나는 안 그러면 되잖아요.'
'교수님! 아니예요! 왜 그러세요? 다들 그래요!'
내게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말로 끝맺은, 코칭때 주고 받은 몇 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곰같이 미련스러운 나는 미련스러운 성향대로 오해를 풀 생각은 커녕 give & give만 하려 든다. '길잃은 양은 길잃은 자체가 벌이니 굳이 내가 알려주거나 벌(?)을 줄 필요가 없다'는 문장 속으로 나를 들이밀어 버린다.
그러다가 내 속의 악마가 스멀거리며 나오는 것도 느낀다. 차라리, 9개 주고 1개 안준다고 변해버리는 사람에게 욕이나 실컷 하는 게 더 나았을까. 나는 천사도 아니면서 천사인 척, 이해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해석도 못하면서 논리적인 척, 마음이 쓰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그냥 내 속에 '9개 주고 1개 안준다고 서운해하는' 그 사람을 미워한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사랑도 마음도 주지 않기로 나는 마음을 닫아 버린다.
이런 내가 사람을 좋아한다. 사랑한다. 소중히 여긴다. 아낀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라는 게 확실하다.
나는 해석하여 참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닌 척하면서 속으로 미워하고 있으니 이는 외면이자 회피이자 원망인 것이다.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희생자인 것에 또 한몫하는 관념이 있다. 아주 묵은지만큼 오래 묵은, 내가 스스로 주입한 것이 아닌데도 살면서 내게 주입되어 지금까지 끌려다니는 관념.
'너는 오복(주1)을 타고 났는데 단 하나, 인복이 없다네.'
옛날에는 초인종을 누르고 나가면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오는 경우가 잦았다. 동네에서 꽤 사는 집이었던 우리집에는 늘 끊이지 않고 스님들이 쌀바가지를 들고 찾아오셨고 천주교신자인 엄마지만 늘 정성껏 쌀을 내어 주셨다. 그 날은 내가 스님손에 든 바가지에 쌀을 담아 드렸었는데 그 때 지나가던 엄마에게 스님이 뭐라 말씀하셨고 엄마는 '무슨 말했어요?'라고 묻는 내게 '네가 오복을 타고 났대. 근데 인복이 없대. 그래서 사람들한테 잘해야 한대.' 하셨다.
이 별 것 아닌 상황이 내겐 커다란 숙제같았다 오복은 뭐고 인복은 뭔지도 몰랐던 국민학생인 나였지만 사람들한테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내 기억으로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는 아이에게내 우산을 줘버리기도 하고 좀 노는(?) 아이들을 대변하느라 교장선생님한테 대표로 혼나기도 하고. 암튼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 어쩌면 좋아해 달라는, 또 어쩌면 그렇게 해야 좋아해줄 것 같아서 그런 '내가 아닌, 내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 행동이 움직여갔다.
역시 관념은 현실로 드러난다.
지배적인 생각이 이끈 현실이 지금의 나다.
대충 입에 발린 소리하는 사람들은 너무 자연스레 두루두루 잘 지내는 반면
진실로 대하다가 어떤 지점에서 서운과 어그러진 균형으로 관계가 어려워지는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오복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육극가운데 우(憂, 주2)의 함정에 빠져 있는 나를 어느 순간 발견했다.
오복을 받고 다른 걱정은 없는데 늘 우(憂)로 마음이 힘든 것이었다.
왜 이 새벽에 구구절절 나의 속내를 들춰내는 걸까......
내 안 깊숙한 어떤 곳에서 찌그러진 채로 사라지지 않는 관념덩어리가 오늘 건드려졌기 때문인가...
어찌 보면 사기를 당하거나 보복으로 괴로운 것도 아닌데 그저 소소하게 내 정성 알아주지 않는다고, 내 마음 몰라준다고 치기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새벽, 어이없는 경우 앞에서 나의 이 몹쓸 관념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타당을 찾고 있나보다. 다시 말하지만, 관념은 형상이 되니까. 생각의 씨앗은 싹을 틔워 현실이라는 열매를 맺으니까. 씨앗을 없애거나 바꿔 심어야겠다.는 발상이 새벽의 나를 강타했던 것이다.
내가 미친듯이 매일 뭔가에 홀린 듯 글을 써대는 이유를 찾으니
말보다 글이 편하고
대면보다 서신이 편하고
눈빛보다 행간이나 기호가 편하기 때문이다.
글로 소통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이다.
결국,
난 여전히 사람이 좋아서 글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길 바래서 글을 쓰는 것 같은 내 속내가 살짝 드러나는 순간, 이것은 참이 아니니 진짜 나의 글을 쓰는 방향으로 나를 옮겨가고 있다. 그러니 포장된 글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노출해도 나는 썩 괜찮아진 것이다.
사실
2년여전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글이 너무 잘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바라봐주길 바랬나보다. 괜찮은 사람으로.
그러다가 글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든말든 신경쓰지 않게 되었나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까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힘을 빼고 쓰니 6개월만에 구독자가 1천을 넘어버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인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소통에 어설픈 것이었으며
나는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날 바라봐주길 바란 것이며
나는 인정받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인정해가는 중이었으며
나는 마음을 닫은 것이 아니라 의도적 단절을 통해 날 채워가고 있었고
나는 육극의 우에 빠진 것이 아니라 타고난 오복에 대한 댓가를 치르기 위해 남보다 섬세했던 것이다.
주1> 오복 - 오래살고 돈이 많고 육체와 정신이 건강하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편안히 죽음을 맞는 5가지의 복
주2> 육극 - 재난을 만나 죽거나 병으로 고통받거나 걱정이 끊이지 않아 괴롭거나 가난하거나 추한몰골이거나 심신이 허약한 6가지의 불행. 이 가운데 우(憂)는 걱정이 끊이지 않아 괴로운 것을 의미한다.
이번 주부터 연재요일이 아래와 같이 변경됨을 알려드립니다!
독자여러분의 양해바랍니다. ==> 와 같이 어제 공지했으나 오늘 새벽발행을 하려니 8/30일부터 요일변경이 된다하여 아래와 같이 재공지드립니다.
월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