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과 '존재감'에 대하여
아주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 내게, 내 주변에 조용히 일어나고 있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 잃어도 눈 치켜세우고 찾는 우리가
내게서 멀어져가는, 잃어가는 자아를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리없는 무지와 손실과 무감각 앞에서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자존감(自尊感). 스스로의 격을 존중하는 마음.
존재감(存在感). 자기가 실재한다고 믿는 마음.
우리는 이 두 개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는만큼 모른다.
언어를 안다는 것은 글자를 아는 것과 다르다.
의미를 아는 것?
아니, 의미까지 깨닫는 것이 '안다'이다.
스스로의 격을 존중하는 마음, 자존감이 낮아서 감정적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지금은 벗어나는 중.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도 아니고 부자이거나 가난해서도 아니고 외향적이라서 내성적이라서도 아니다. 자존감은 외적인 것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철저하게 자신을 자기로써 인정하고 수용하고 자기자체를 겸손하게 존중하는 마음이면 '자존감이 높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감은 자존감과 이란성쌍둥이같은 개념이다. 존재(存在), 있을 존, 있을 재. 내가 나로써 채워졌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으로, 외부의 것으로 채워졌다면 존재감이 바닥인 것이고 바닥없이 세워진 자존감이라면 아무리 채워졌다 해도 결코 편하지 않다. 이 경우 자존감의 수위와 비례하거나 더 높은 수위로 오르기 위해 빠른 속도로 허무와 공허가 추격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우울한 이유,
정말 잘 하는 사람이 무능감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존감이 낮아서가 아니라 존재감이 없어서이다.
결국,
자존감을 높이라고 자꾸 얘기하지만
정작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존재감이어야 한다.
제 아무리 이란성쌍둥이지만 형이 먼저 나오고 동생이 나온다.
존재감이 먼저 존재해야 자존감이 세워질 수 있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심리상담이니 감정코칭이니 뭐니 전세대에 퍼져 성행하고 있지만
왜 우울증환자는 급증하고
자살률은 여전히 OECD 1위이고
왜 불안지수는 높아지며
왜 고독사도 증가하며
왜 자기정신이 없어야만 살아지는 치매환자 역시 그 연령대가 계속 낮아지는가 말이다.
그토록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또 주변에서 애쓰는데 말이다.
기본없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견고한 탑을 쌓은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공든 탑도 무너진다.
기본이 없거나 부실하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존하고 존재한다.
이 둘의 관계부터 기본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좋겠다.
일단 먹어야 산다. 가장 기본이 되는 욕구부터 채워야 그 다음 차원의 욕구를 채울 수 있다. 유명한 매슬로우(Maslow)의 인간욕구 5단계만으로도 우리는 욕구에 대한 단계를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너무 보편화된 이론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단, 이 이론에서 전제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1단계부터 차곡차곡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전단계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를 채울 수 없다. 배를 곯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강이나 기타 자원에서 안전할 수 없고 안전하지 않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애정을 느끼기 어려우며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생존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
존재는 있.으.면. 좋은 것.
따라서,
이 둘의 관계를 좀 더 정리해 언급하자면
생존은 외부에서, 존재는 내부에서 해결된다.
외부에서 먹거리가 들어가야 하고 외부에 비바람을 피할 은신처가 마련되어야 하며 외부에 뭐라도 걸쳐야 몸을 보호한다. 반면, 관계의 안정에서, 사회적 안녕감에서, 자아의 인정에서 존재감은 채워진다.
자, 그럼 자존감이 낮을 경우, 가장 바닥에 생존에 대한 불안은 없는지.. 기본적인 생존에 대해서는 해결되었다는 전제 위에 존재감과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 즉 존재감은 필요가 채워진 후 내면이 깨지지 않는 느낌? 자존감은 이러한 존재감이 실현? 아니, 제대로 형성만 되었다면 좀 덜 가져도, 덜 유능해도, 덜 인정받아도, 덜 잘나도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시선이며 사랑하는 마음이며 존중하는 태도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자신의 격, 수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자존감이고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깊고 크다는 것이다.
역으로 얘기하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치를 지닌, 지향하는, 추구하는 자. 즉 존재감이 형성되어 있는 자는 고통스러워도 이 고통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고 있으니 자존감이 높은 것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아도 꿈이 있으니까 자존감이 높은 것이다. 가진 것이 기준이 아니라 가질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과 믿음이 자존감의 수준인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존재감이 든든하게 모루처럼 받쳐준다면 정체불명의 원형은 제 아무리 강하게 내리치는 현실의 망치질에서도 견디고 버티며 서서히 원하던 조형물의 모양새를 갖춰간다. 그렇게 깨지는 아픔으로 불꽃을 튀며 울어대지만 이 불꽃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발현되는 창조의 불꽃인 것이다.
하지만, 모루가 부실하거나 없다면 쇠망치의 가격은 커다란 타격으로 크게 반동하여 원형보다 못한 조형물을 만들어 낼 것이고 불꽃의 어지럽고 규칙성없는 발사는 제 맘대로 여기저기 튀어 결국 한때의 화려했던 요란함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렇게
존재감이 모루처럼 든든하게 받쳐 준다면 자존감은 충분히 단단한 형태를 지닐 수 있지만
존재감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꽃이 튀듯 자존감이 높다고 느끼는 것은
찌그러지고 일그러지는 자존감에 화려하기만한 불꽃인 자만이자 허영, 허상이자 망상의 착각인 것이다.
옷은 옷걸이에 걸어두는 것이 당연하듯 당연히 있어야 할 그 곳에 나의 존재를 자리잡게 해야 한다. 류마티즘 환자들이 자신의 감각을 잃고 날씨에 따라, 바람에 의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감각을 강요당하듯 존재감이 없이 쌓인 자존감은 자기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자신의 감정과 이성을 조종당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알든 모르든간에 헤매는 자아는 절망으로 나를 가격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느낀다는 것은 절망을 의미한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감금한 사람처럼 무서운 속박을 받는 사람은 없다(주). 자기안이 자신을 감금한 채 타인이나 다른 무언가로 채워졌다면 망상에 속박된 것이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채워지니 나 스스로의 자유를 내 인생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자다.
거죽은 멋지고 화려하고 가진 것이 많지만 스스로의 정신과 사상과 철학없이 타인의 것으로만 채워진다면 내 명의의 통장일뿐 들어있는 돈은 모두 남의 것인 것과 다름없다. 보여지는 나와 내가 아는 나의 갭이 클수밖에 없으니 현실을 망각한 착각과 망상에 빠져 오히려 더 자극적인 것을 찾거나, 거짓의 화려함에 길들여져 더 드러내 인정받으려 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자기얼굴 숨키고 억지미소짓는 삐에로이거나 날개접고 노래나 불러대는 새장 속의 새인 것이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은 이처럼 무서운 삶을 예고한다. 스스로 속박하고 있는 이 감금상태보다 탈출하기 힘든 감옥은 없는(주)데 말이다.
그러니
쉽게 예를 들어,
내 기분이 어떤 대상(사람이든 사물이든)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내 안은 그 대상으로 채워진 것이다. 아이만 바라보고 살던 엄마들이 아이들이 떠나면 빈둥지증후군으로 위태롭고 은퇴연령의 퇴직자들이 실업에 대한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존재감없이 자존감을 아이에게, 사회적 위치에, 또는 어디든 외부에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배우자, 자녀를 비롯한 대인(對人),
사회적 명예, 경제수준, 착한 사람, 똑똑한 사람을 표상화한 대상(對象),
집이나 자동차, 명품 등의 어떤 물건과 같은 대물(對物).
대인, 대물, 대상....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떤 현상이든. 뭐든 자신의 내면이 어떤 존재에 온통 걸려 있다면 이는 존재감이 자기 내면이 아닌, 외부에 걸려 있는 것이기에 인간본성의 원리에 그릇된다. 그릇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할지라도, 주변에서 제 아무리 멋지다, 착하다, 잘한다 우쭈쭈를 남발하여 나를 기가 막히게 속였더라도 자신의 자아만은 알고 있다. 자신의 주인이 진정한 자신에게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음을 말이다.
자신의 자아를 인지시키는 내 몸의 주체는 영혼이다. 존재감은 소멸된 채 자존감을 견고히 쌓아올렸다 하더라도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영원히 존재하는 자신의 영혼은 반드시 자아를 되찾으려 현실의 자아를 파괴시키고야 만다. 자아를 소유하는 것, 자아로 있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인용(현실적이고 무한한 승인)이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영원성의 요구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원은 꼭 그렇게 하고야 만다(주).
그러니, 앞서 언급했듯 생존은 외부에서, 존재는 내부에서 견고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줘야 한다. 이 둘의 조합으로 '나'의 바닥이 단단하다면 굳이 자존감이 어쩌구, 자신감이 어쩌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존재의 갈고리는 밖이 아닌 내 안에 걸려 있어야 한다.
우리 현대인들은...
참으로 교육열이 높고 아는 것이 많은 현대 우리들은
어쩌면 기본을 저어기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혹 잃어버린 것조차 망각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각자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위험하고 무서운 무지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허덕임이 내게 갈구하는 것은 '나'의 본성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라는 것뿐인데 말이다...
자존감있는 삶을 위해 '나'의 '자아'가 원하는 기본을 다시 챙겨달라는 요구뿐인데 말이다...
'나'의 '자아'가 진정 원하는 유일한 것은 '나로서의 자유'뿐인데 말이다...
주> 키에르케고르선집, 키에르케고르, 집문당
[건율원 ]
삶의 가치실현을 위한 어른의 학교, 앎을 삶으로 연결짓는 학교, 나로써, 나답게, 내가 되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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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북살롱]
[지담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