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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n 12. 2024

글쓰기는 희망에서 고문, 절망으로!
그러나 찬사를!!!

'절망, 글쓰기'에 대하여 

희망고문같은 글쓰기를 통해 나는 감사를 배웠다.

그저 매일 쓰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으니 그저 썼을 뿐인데

너무 큰 선물이 내게로 왔다.


심지어 오늘은 '절망'이 커다란 감사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글을 쓰면서 '절망', '좌절', '고통', '외로움'에는 미운정이 너무 듬뿍 들어 이제 친구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고독'과 이제 절친이라는 표현까지 했겠는가.


내게 이런 단어들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또 그런 감정에 빠지더라도 '올 것이 왔구나' 정도로 쉬이 넘기기 일쑤지만 감기처럼 순간 아프고 금새 낫고를 반복하니 이 놈은 언제 면역이 생기나 싶기도 하고... 게다가 글이 내 인생을 먹여 살려주길 바라는 희망이 고문이 되어 압박으로 느껴진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짓(?)을 멈출 수 없는, 멈춰서도 안되는 너무나 주관적인 타당한 이유는 매일 생긴다. 

읽으면서 깨닫고 깨달은 것을 글로 풀어내는 억척스러움은 

매일의 시간과 정신의 즙까지 짜내어 

내 삶의 알맹이에 꼭 필요한 양분으로 스며들고 

심지어 즙을 뽑아낸 찌꺼기마저 본질적인 성분이 무엇인지 내게 보여지니 어찌 멈출 수 있을까 싶다. 


또한 이런 소소한 하루들이 쌓이면서 나는 믿.어.진.다. 

글로 먹고 사는, 글로 나의 존재가치를 지켜낼 수 있는, 글로 나다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형상으로 점점 선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희망고문은 믿음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었다.

믿음이란 이렇게 나의 이성과 감정을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상실케하더니 재건설해주었다.


시인들의 시인이라는 세익스피어가 '절망에의 안락한 길에서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가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주1)'고 한 말의 의미를 50이 넘도록 몰랐었다. 왜 절망이 안락한 길인지, 왜 절망에서 날 끌어내주는 자에게 저주를 퍼붓는지. 그런데 이제 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어렴풋이 의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 내내 희망은 고문과 같다. 늘 좌절감과 절망감에 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는 분명하다. 또 써야 하네, 뭘쓰지, 이렇게 쓴다고 될까? 하다가 또 한 순간의 영감에 글이 후루룩 써지고 독자들이 공감을 해주면 역시 글쓰길 잘했어. 하면서 어린애처럼 변덕을 부린다. 


뒤를 돌아보고 나와 나의 글을 의심하는, 관념에서 싹튼 이성과 감정을 절망이라 표현한다면 

결국, 

절망은 

내가 '필연적인' 무언가를 수용하는 태도, 복종하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내 의지는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 하지 글로 뭐가 되겠냐고 날 저리로 이끌지만 

'필연적인' 무언가가 내 의지를 이겨버리니 말이다. 세익스피어는 절망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신을 이끌 신의 의지를 마주한 것이다. 그렇게 복종하고 따른 것이다. 더 큰 의지로 자신의 유한한 의지를 꺾는 것인데 이를 외면하게끔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절망(絶望), 끊을 절 / 바랄 망.

바라는 바를 끊어버리는 것.

인간본성은 욕구, 추구하는 데에 있다. 

바라는 것은 본능이자 본성이고 바라는 자체는 이미 본유(本有)하기에 형상화된다. 

이는 지난 글 [보이는 모든 현상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증상이다.]에서 충분히 논증을 펼쳤으니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고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바라는 바를 멈추는, 즉 절망하는 것은 인간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두 갈래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본성, 그러니까 자기자신에서 벗어난 자라면 

첫째, 자아를 완전히 상실하거나 둘째, 자신이 알지 못했던 더 큰 자아로 향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자는 자아상실, 후자는 자기재건, 자기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절망은 자신의 한계앞에 선 것이니 결국 자기파괴만이 한계를 너머 신성한 자아의 세계로 넘어설 수 있다. 

다시 말해, 

절망은 자아의 파괴를 통해 

더 큰 자아로 현실적 자아를 인도하는 것이다. 

절망앞에서 전자와 같이 자기파괴없이 그저 뒤돌아서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여 우울과 한계에 갇혀 살기도 하고 후자처럼 자기파괴를 거쳐 희망과 초월된 자아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용기가 두려움 앞에서 등장하듯

초월된 자아로의 진입은 절망 앞에 등장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신체, 즉 물질적인 몸뚱아리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자아도 함께 태어난다. 내면의 자아, 초월적 자아, 고차원적인 자아. 뭐라고 불러도 좋은 그 자아와의 조우가 절망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나의 존재가 '기능적'이거나 또 다른 '유한'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느끼는 절망은 결국 자체의 해독력으로 '필연'으로 내게로 와야 할 숭고한 '무한의 가능성' 앞에 워둔다.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더 숭고한 자신을 발견하는, 인간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알면서도 가능성을 믿는 것, 그 때 신도 그를 돕는다(주2)는 위대한 철학자의 표현대로 절망은 내 의지로 결코 해낼 수 없는 어떤 지경을 신의 기적적 개입을 통해 경지로 승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아... 나도 몰랐던 나의 심연속 자아와 신의 개입으로 날 인도할 절망에게 어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으리까.

아... 나에게로 오는 좌절감이여, 날 어디로 데려가든 난 기꺼이 좌절의 손을 잡으리라.

아... 날 파괴시키려 내게 쳐들어오는 절망감이여, 무섭고 미운 모양새로 오더라도 네 안의 순수한 사랑을 이제는 알기에 내 너를 두 팔 벌려 껴안으리라...


고로

글쓰는 고통, 좌절, 절망, 희망고문, 뭐 이런 단어앞에 나는 감사히 두 손을 모은다. 

더 절망해도 괜찮으니 더 나를 파괴하여 나를 정화시키소서.

더 좌절해도 상관없으니 더 나를 외면하여 나를 재건시키소서.

더 고통스러워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더 나를 꺾어 내게 나보다 더 큰 의지를 개입시키소서.

결국,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날아가는 새를 쫒다 가던 길 되돌아오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라 

절망 앞의 깨달음을 통해 까치발을 뜨고라도 이 자리를 지키게 해주소서.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자신으로만 존재하도록 자기에게만 전념하는 분수같은 존재(주3)'. 

수없이 날 가격할 좌절의 고통만이 

베푸는 영혼이 없어 퇴화(주4)하는 내가 아니라 

영혼의 베품으로 날 진화시켜

나를 나로서 있게, 서게, 살게 하는 힘인 것을...


이로써. 나는 나의 변화를 통해 뒤돌아보며 만든 계단이 더욱 단단해짐을 느끼며 다시 들여다본다. 


잠깐 나를 세워두는 자기의심.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들여다보는 자기부정.

나의 못난 모습을 직시하는 자기인식.

지금의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찾는 자기검열.

이를 통해 깨부수어야 할 자기파괴.

파괴된 것을 없애버리는 자기살해.

치열했던 그 시간을 이겨낸 자기극복.

비워진 공간을 새롭게 채우자 다짐하는 자기배양.

배양된 씨앗에 싹을 틔우려는 지난한 과정의 자기정복.

모든 과정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나를 이끌 자기암시.

그리고, 

드디어 허물을 벗고 깨끗해진 자기정화.     


주1> 리처드 2세, 3막2장, 세익스피어

주2> 키에르케고르선집, 키에르케고르, 1994, 집문당

주3>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릴케, 2003, 태동 

주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2015,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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