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Jun 18. 2024

상상하라!
단, 상상에도 질(質)이 있다!

'상상', '꿈'에 대하여 

감정, 인식, 의지

이 모두는 상상과 관련된다.

상상에 의해 감각이, 감각에 의해 감정이, 감정에 의해 이성이, 이성에 의해 의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느 정도의 감정과 의지를 지니고 있느냐는 그 개인의 상상이 무한함 속에서 자유를 지니는지 무한함 속에서 방종을 일삼는지 알 수 있는 표현일 수 있다.


구체화되지 않은 상상은 

망상, 허상, 공상이라 불린다. 

이는 목표도, 형체도 없는데서 기인하기 때문에 감정에 지배당하는 상상이며 감정에 지배당하기에 의지도 기분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취해야 할 과제 앞에서도 기분에 의해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자신의 해석도 '나름대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타당화, 합리화하는 이성으로 자신을 소모시킨다. 이 때 활동한 이성이 기존의 인식에 경험 하나를 보태면서 인식은 점점 강화되어 더 자신을 소모하도록 행동을 이끈다.


이럴 때 의지를 강화시키면 무한한, 한계없는 상상의 공간에서 의지는 모든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제 맘대로 돌아다닌다. 결국 현실을 외면한 채 어딘가 감정적으로 안락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현실의 나를 지속적으로 거절, 거부하며 그 순간 성취할 수 있는 작은 일조차 해내지 않아도 되는 의지로 자신을 키운다. 


이러한 의지에 감염된 의식은 점점 의지에 종속되며 스스로를 바로잡으려는 힘조차 잃게 되고 

감정, 인식 혹은 의지가 공상적으로 됨에 따라 마침내는 자아 전체가 공상적이 된다. 

이렇게 의식을 잃은 자아는 더 이상 자아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자아상실로 이어진다.


반면, 구체화된 상상은 

믿음의 동력에 더욱 힘을 실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형체를 지닌 목표는 비록 무한함 속, 상상속의 형체이지만 '모든 근원물질은 형상화된다(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상)'라는 타당한 명제에 의해 자체동력을 지닌다. 상상이 자체동력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이 강력하고 즉각적인 힘에 감정은 이끌리는 것이다. 될 것 같은 느낌과 되었을 때의 기쁨이 우선순위로 나의 가슴에 자리를 잡는다. 이 기운은 그대로 이성으로 전달되어 기존인식을 배제한 채 우선행동에 명령하는, 질서잡힌 정신의 명철한 힘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정신의 소유자에게 '의지'란 그다지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의지를 너머선 더 큰 의지, 그러니까 상상자체가 지닌 의지에 의해 내가 보유한 의지는 그리 크지 않으니 말이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내 의지로는 그렇게까지 해낼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화되는 기이하고 기묘한 현실이 내 삶에 진입한 것이다. 


데카르트(주1)가 명증했듯이 정신이 물질로, 물질이 정신으로 이어지게 하는 그 연결선상에 존재하는 신이 내 인생에 개입된 것이다. 신은 자신의 의지에 구속을 가하는 단단한 자아의 소유자를 간택한다. 


그러므로 상상은 감정과 인식과 의지 모두에 관여하지만 '어떤 상상'이냐에 따라 그 무한의 힘이 투자가 될지 소모가 될지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나아가는 것이다.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이리 가든 저리 가든 다시 유턴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 다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정'이 '반'을 이기는 보편의 법칙에 따른 높은 확률과 '합'이 지닌 질과 속도를 감안할 때 어떤 상상이냐에 대한 방향성은 정해질 것이다.


감정이 의지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된다.

브런치라는 공통된 공간에서 쓰고 읽는 모든 이들과 공감하기 위해 2년째 매일 새벽 5시 발행을 지켜온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의지가 감정을 아직은 이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의지와 감정이 서로 밀당하며 매일 심하게 다투지만 결국 결과적으로 5시 발행을 했다는 것은 의지가 감정을 이겨낸 것이다. 그 사이사이 숱하게 지나온 하루들에 감정을 자극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물론, 내 의지니까 맘대로 여유를 부리며 여유자적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단, 이러한 권리는 성 이그니티우스 로욜라가 예수회 신학대학을 건립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최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고 내뱉은 한마디, '신성한 무관심'과 같아야 할 것이다. 

성 이그니티우스 로욜라는 만일 교황이 예수회 신학대학을 탄압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25분정도 기도하고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 것이 모든 고행중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이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성한 무관심' 을 달성하는 것 말이다(주2).


모든 고행중에 가장 어려운 고행이라는 로욜라 신부의 말처럼 내가 최선의 에너지를, 의지를 쏟아붓고 나서 '의지'가 발현할 결과를 믿고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는 의지. 구속에 의해 자유를 얻은 의지라면 이 때의 의지는 자유로이 유영할 권리를 누려도 좋을 것이다. 


상상에도 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내 머리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더 구체적으로 그려봐야겠다. 상상의 질은 구체화/추상화 둘로 나뉜다. 추상적인 상상은 감정에 좌우되니 기분에 따라 기준이 오락가락하여 내 의지를 맘대로 방탕하게 내버려둔다. 반면 구체화된 상상은 까치발로 걷거나 절름거릴지라도 명확한 목표를 향해 명증의 정신으로 명철하게 이성과 감정을 구분지어 나의 의지를 행동으로 연결시킨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격있는 삶. 

인간의 격.

질높은 삶.

인간의 질.

즉,

'인격과 자질이 갖춰진 어른'으로서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정신의 이유기를 건너뛴 채 체한 시간들을 숱하게 보낸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새벽독서 5년과 새벽5시 글 발행 2년의 시기는 

건너뛴 시기가 드리운 그림자가 분명 어떤 시점에서 내게 반격을 가할 것이 두려워

제대로 다시 보낸 정신의 이유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유기를 보냈으니 유아기를 거치겠지. 

그렇게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내고 진짜 어른이 되어가겠지. 

지식을 너머 지혜를 갖춘, 재능을 너머 자질을 함유한, 기준을 만들어 수준과 격을 가늠하는 그런 어른이 되어가겠지. 


나의 정신속 구체화된 상상은 

나의 모습, 나의 환경, 나의 삶 전반에서 날 움직여줄 동력이 될 것이고

제 맘대로 움직여댄 의지와 감정이 적합한 자리에서 자신의 위력을 때에 따라 조절할 것이며 

이로서 삶의 주체자로서의 자아가 그토록 찾아다니던 자신과 조우하고 

정신과 감정이 사이좋게 손잡고 보폭맞춰 걷도록 도울 동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구체화된 상상은 

통제력을 지닌 의지로서 의도된 구속을 가하며 의미있는 결과를 현실에서 창출하는 근원인 것이다.


주1> 방법서설, 데카르트, 문예사

주2> 영원의 철학, 올더스헉슬리, 김영사


[건율원 ] 

삶의 가치실현을 위한 어른의 학교, 앎을 삶으로 연결짓는 학교, 나로써, 나답게, 내가 되는 학교

(*'가입'하신 분께는 2만원쿠폰 & 무료 강의에 우선적으로 초대해 드립니다.)

https://guhnyulwon.liveklass.com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읽고 함께 쓰는 놀이터,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 연재]

월 5:00a.m. [지담단상-깊게 보니 보이고 오래 보니 알게 된 것]

화/수/일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부모정신'이 곧 '시대정신']

금 5:00a.m. [나는 나부터 키웁니다!]

토 5:00a.m. [이기론 -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전 08화 인내는 짧고 집념은 허술하며 끈기는 끊어진 당신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