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때문에 곁길로 이끌렸소'
록시아스의 예언대로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와 몸을 섞고, 또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의 피를 흘리게 하리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큰눈('눈'은 소중한 것, 빛을 의미)을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망명자로 살며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다.
이에 그의 아내 이오카스테는
'사람이 왜 두려움을 가져야 하나요? 운수가 그를 지배하고, 그 어떤 일에 대한 예견도 확실치 않은데요? 누구든 되도록 신경쓰지 않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그대는 어머니와의 결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세요. 필멸의 인간들 중 여럿이 이미 꿈에서도 어머니와 함께 잤으니까요. 이런 것을 아무 일도 아닌 듯 여기는 사람이 삶을 가장 쉽게 견디는 법입니다.(주)'라고 말해준다.
나는 지금 무엇이 두려워 시도해야 할 것 앞에서 머뭇거리는가?
나에 대해 어떤 이의 예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리 찾아봐도 날 위협하거나 방해하거나 내 속을 썪이며 날 가격할 일도 없는데 나는 왜 두려워하는가?
두려움은 갈길이 아니라 곁길로 나를 이끌 수도 있을텐데 무엇때문에, 왜?
사실, 여기, 시골에까지 온 이유가 뭐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난... 두려워진다.
명확하게 정량화시킬 무언가가 없는 것인지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표현할 언어가 부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끌려 왔다'는 답변밖에 없는 두려움.
아마 이 두려움은
무언가를 해야, 해내야 하는데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조급과 긴장과 책임에 대한 압력이 팽창중이라는 신호일 것이다.
아마 이 두려움은
절대적인 어떤 존재에 간택당한 듯 홀려 있는 이 사실에 대해 확신을 주고자 내게 오는 자극일 것이다.
두려움의 배후에는 공포가 있다.
내게 공포스러운 것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까지 하며 내 모든 것을 내걸고 있는데 이뤄내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갈망으로부터의 집착,
책임으로부터의 의무,
결과로부터의 의지,
자신(自信)으로부터의 순종,
자아로부터의 자유에서 말미암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두려운 공포는
응당 올 것이 온 것이며,
올 것이 더 가까이 온 것이며,
올 것이 때맞춰 내게 압력을 행하는 것인데
왜 나는 두려움을 다른 감정들보다 가장 앞줄에 세워 맞서고 있는 것인가?
이오카스테의 말대로 '이런 것을 아무 일도 아닌 듯 여기는 사람이 삶을 가장 쉽게 견디는 법'인 것이다.
해내야할 숙명적 과제 앞에서
그저 일상처럼
그 일을 해보는 것,
그냥 하는 것,
그러다 되는 것,
그렇게 이뤄지는 것이 그것이 가는 길임을 아는데
역시 감정이란 녀석은, 특히 두려움이란 공포를 배후에 둔 녀석은 날 곁길로 이끌려 유혹한다.
해야할 것이 가는 길은 하고 싶은 걸 놓아버린 손을 잡고
자기신념에 대한 순종은 갈라진 마음인 의심의 손을 잡고
결과로부터 짜내는 의지는 부족한 자신을 인정한 손을 잡고
갈망에 대한 추구는 조급과 집착과 초조의 손을 잡고
그렇게 평행한 길 위에 손잡되 따로 걷자.
내 삶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보고자 움직였던 본성의 길 아닌가.
내 삶의 즙까지 모두 짜내어 살아보려는 의지의 길 아닌가.
내 삶을 통으로 관조하고자 떠난 해안의 길 아닌가.
내 삶의 본성에 따르고자 찾아나선 자유의 길 아닌가.
그러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한쪽만 존재할 수 없기에,
취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기보다 이쪽저쪽 모두 내 인생의 소중한 길임을,
그렇게 다 버무려지지 않은 반죽처럼 이성과 감정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더라도
그냥 손잡고 내 안에서 갈길 가도록 내 시선 닿는 곳만 바라보며 두 다리를 움직이자.
다리가 하는 일에 머리는 때로 방해밖에 안되니까.
머리가 하는 일에 심장은 때로 혼란만 가중시키니까.
심장이 하는 일에 다리는 괜히 넋두리만 늘어놓게 하니까.
그냥 따로 가되 함께 손잡고 가보자.
두려움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출동하지 않는 녀석이다.
필경 뭔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내 인생에서, 내 삶에서, 내 안에서, 내 미래의 가능성 안에서...
두려움때문에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나는 이 두려움에 감사하며 배후의 공포에도 손을 내밀며
그렇게 미지의 길로 나가보자....
주> 오이디푸스왕, 소포클래스,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