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독서'의 동반자들에게
나의 새벽독서는 벌써 5년을 훌쩍 넘기고 3개월 뒤면 6년이 된다. 혼자가 함께가 된, 2년여전부터 시작한 새벽독서모임.
5-6시까지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성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6-7시에는 자유롭게 배움을 나누며 각자 걷는 사유의 세계를 동반자들과 이야기한다.
나와 새벽을 함께 하는 이들을
나는 '동반자'라 여긴다.
물론 이들은 책을 추천받고 강의와 토론에 참여하고 1주에 1회 내게 1:1코칭을 받는 것에 대가를 지불하지만 이는 내가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합의에 의해 한쪽으로 계산서가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또 나란히 손잡고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위해 가야할 동반자로서의 책임이 각자에게 주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어떤 책임일까?
간단하다.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여 자기로서의 삶을 찾고, 살고, 누리고, 나누는 자신으로 스스로를 키우는 것.
새벽독서라는 쉽지 않은 진입장벽을 매일 넘어서며 자기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어 스스로를 진화시키는 것.
책속 성현의 말씀에 자신을 얹어 자기도 몰랐던 자아와 매일 속삭이며 미래의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렇게
자기만의, 자기다운, 자기여야만 하는 자기삶의 길을 만들어
닮아도 좋은, 스며들어도 괜찮은, 그런 당당한 어른이 되는 것...
그래서 이들은 나의 동반자이다.
나 역시 그들의 동반자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으려 애쓴다.
사람이 자신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은
비단 자기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로부터 관계된 모든 것을 위함이리라. 한사람 한사람이 위대한 우주라는 말은 그래서 절대진리다. 나 한사람 제대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시간을 농축시켜 하루를 일구고 지식을 응집시켜 지혜로운 경험을 쌓는 이 작고 소소하고 미미한 행위는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집단을, 사회를,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초이자 기본인 것이다.
누군가가 단 1분이라도 새벽이 또 다시 자신에게 주어짐에 감사를 전하고
누군가가 단 1명이라도 태양이 떠오르는 기운에 자신의 심장을 내맡기고
누군가가 단 1권이라도 성현의 말씀에 자신의 정신을 씻어낸다면
소소한 1이 거대한 전체를 이룸에 누가 감히 아니라고 반론할 수 있을까?
1이 2가 되고, 2가 다시 1씩 모아 4가 되고, 4가 다시 1씩 전해 8이 되는 복리야말로 우주의 배분법칙이 아니던가?
나 하나 새벽에 책을 읽었을 뿐인데,
나 하나 나의 사상을 만들기 위해 관념을 깨고 의식을 일깨우려 애썼을 뿐인데,
나 하나 따뜻한 이불 힘차게 걷어내고 차가운 새벽공기속 태양을 맞았을 뿐인데,
나 하나 졸린 눈 비비고 곧게 펴진 허리 굽혀 날 잡아끄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이런 나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하나가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거대한 원심력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중심의 변화는 자체동력으로 원을 키워나가는 나선의 확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나 하나, 내 소소한 행동 하나, 내가 소모하는 이 짧은 1분을 위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을 우주가 돌아가는 원심력의 중심에 세워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을 그 중심에 꼿꼿하게 세워 자기존재위에서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오로지 나여야만 할 그것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고귀하게 자신을 키워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나 자신이 그 무엇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1인이라는 사실을 내 심장에 꽂아둘 필요가 있다.
나를 위해 태양이 뜨고
나를 위해 겨울이 오고
나를 위해 강물이 흐르고
나를 위해 사람이 나타나고
나를 위해 성현이 펼쳐지고
나를 위해 별이 자리를 물리는 것이다.
'나'를 위해 모든 대자연이 움직이는 것이다.
대자연의 정밀하고도 체계잡힌 불변의 질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거늘,
과연 이 이유라는 것이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일까?
왜 그 이유가 '나를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는가?
왜 그 중심에 나를 세워지 못하는가?
내가 아니라면 너인가? 그인가? 그녀인가?
아니면, 산짐승, 들짐승, 그 누군가, 무언가인가?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겸손이 자만으로 여겨진다면 나는 항상 무언가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탐내는 탐욕자란 말인가, 아니면 그 자리를 훔쳐내는 도적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서 침흘리며 코만 킁킁대는 산짐승이란 말인가, 그래 좋다! 이도 아니면, 이미 생명을 끝낸 목석이란 말인가?
무엇이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명제를 반박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림없다.
모든 대자연은 나를 위해 움직이며 나를 위해 성찬을 마련해두었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갖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무지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상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자연의 일부로서 기생하기에 기능해야만 한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대자연이기에 나 역시 '대자연을 위해' 주어야, 해내야, 이뤄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매 순간 자연에게 빚지며 사는 나이기에,
나를 중심에 세워준 대자연이기에
나 역시 '세상이, 자연이, 우주가 내게 이루라 명한 것이 무엇일까?'를 알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주는 나를 중심에 세우고 내게 책임을 다하라 한다.
대자연은 내게 모든 걸 다 내줄테니 내 몫을 다하라 한다.
나로 인해 세상은 어떻게든 점진적 변화를 이루어가니 오늘 해야할 양을 채우라 한다.
새벽, 태양이 뜨기 전 내 약속한대로 너를 마중나왔으니
새벽, 책을 펼치기 전 내 약속한대로 당신에게 순중할 것이니
새벽, 글을 쓰기 전 내 약속한대로 진정과 진솔을 담아낼 것이니
나는 어떤 명을 받았든 그것을 위해 이렇게 자연이 준 '하루'라는 시간에 합당한, 마땅한, 적합한 나로서 오늘도 기능해야 할 것이다.
새벽의 나, 나의 동반자 모두는 자기 자신의 삶을 우주의 중심에 세우고
하루의 즙까지 짜내어 자신의 엑기스를 뽑아,
삶의 본질대로 삶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을 스스로 자처한 자들이다.
그렇게 조금 더 어른다운 어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자기가 만들어낸 굴레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명에 따라 자기삶을 이끌겠다 세상앞에 자청한 자들이다.
그렇게 자신이 쓰임으로서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이롭게, 자신으로부터 합당하게, 자신으로부터 보여져도 괜찮은, 그런 인간으로 살겠다고 자신을 키우는 자들이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