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선뜻 행동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머리는 아는데 가슴이 뒷걸음질을 치고 다리는 제자리를 고수한다.
머리의 말을 가슴과 다리가 거부하는 것인지
머리가 더 강력하게 밀어붙일 힘이 없는 것인지
가슴과 다리가 머리를 이겨먹으려 덤비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없고, 의지가 약하고, 또는 타협할 거리들을 찾는 못된 정신에 나는 가끔 진땀을 뺐다.
그리고는 '난 왜 용기가 없지?', '난 왜 두렵지?', '한번 안했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닌데 뭘..'하며 나 자신을 탓하거나 나 생긴대로 살자 단념하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적절한 타협에 힘을 주는, 본질에서 완전히 어긋난 방향으로 내 정신은 날 어지럽혔던 것이다.
오늘은 감히
새벽+독서+글을 통해 이런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5단계를 말해볼까 하는데...
그러니까, 나를 세워두고 내게 온 사태, 상황, 모든 것들을 분리시킨 상태로 보는 것이다. 가령, 내겐 심한 두통이 있었고 그 때마다 중독성강한 약을 먹었었다. 편두통은 지금도 신호가 오면 두려워진다. 아.. 어쩌지? 약을 미리 먹을까, 그냥 좀 버텨볼까? 하면서.
이 때 분리!
나 vs 두통.
또 내가 싫어하거나 꺼리는 누군가가 날 찾아온다고 하면 그 때부터 심장이 두근댄다. 오지 않길 바라는 맘은 크지만 거부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그 사람이 올 때까지 난 계속 진정이 안된 채 번잡한 정신에게 농락당하는 느낌을 갖는다.
이 때 분리!
나 vs 불편한 감정.
그러니까, 내가 내게서 분리된 두통을, 예기치않은 방문으로 인한 불편한 감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두통이, 불편한 감정으로부터 나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 두통이 내게 성큼성큼 걸어오며 나의 반응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오호!! 너 겁먹었지? 앗싸! 신난다!' 하고, 불편한 감정이 '역시 이번에도 넌 날 거부하려는구나! 맛 좀 봐라!'하면서 날 공포로 몰아넣는 것이 느껴진다. 이 때 그것들은 '오고 있는 대상'을 거부 내지 대항하려는 나를 조롱하거나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손님이 내게 올 때 내가 고르지 않는다. 맘에 드는 손님도 있지만 나를 귀찮게 힘들게 어렵게 하는 손님도 있다. 그런 손님이 온다고 내가 못오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이고 있을 필요도, 겁을 먹고 덜덜 떨 필요도 없다. 그냥 손님이니까.
오는 손님은 무조건 가니까.
그냥 오는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싫은 손님이 오면 그냥 왔구나 하는 것이지 극진하게 정성껏 대접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굳이 싫은 내색 팍팍하면서 거부할 필요도, 왜 왔냐고 따질 필요도 없이 그냥 왔으니 잘 있다가 가라고 나는 내 할일하며 기본적인 예의로 대접하면 그만이다. 두통도, 불편한 감정도 그렇게 왔구나 인정하고 대충 관심주고 말면 갈 시간되면 가는 손님인 것이다.
싫어하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겸연쩍어서 또는 일부러 알아차리라고 그냥 내 할일만 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손님이 언제 갔는지도 모를 때가 있다. 오는 손님 거부하지 않듯 가는 손님 잡지도 않는 것이다. 그냥 갈 때 인사못한 게 좀 맘에 걸릴뿐 가면 속 시원한 것이다. 집중하는 곳이 무조건 커지듯이 손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내 할일에나 집중하면 된다는 의미다.
손님은 자기한테 굳이 관심두지 않는 주인에게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씩 뜸하게 방문하겠지.
그러다가 아예 안오겠지. 그러면 된다.
불편한 감정의 경우, 관심주지 않으면 알아서 없어지고 다음에 같은 심정으로 불편해지더라도 손님이 금새 가버리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통약을 달고 살았던 이유는 지난번처럼 아플까봐 미리 겁먹어서였는데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반응하지 않기 위해 약을 먹지 않았다. 약을 먹는다는 것은 대비의 차원도 있지만 겁내고 있다는, 싸우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니 관심주지 않는다는 신호로 약(대비)을 먹지 않았다. 지금? 당연히 수년째 그렇게도 날 옭아매던 편두통이 날 너무 싫어해서 내게 안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5단계를 하지 않으면 내가 분리시킨 그것들이 나에게서 할일을 끝내지 못한 불만과
내가 자기를 떠밀어낸 것으로 여기는 오해와 불신, 그리고 복수심,
이번만큼은 내가 이기고야 말리라는 비장한 각오까지 보태어 더 강하게 내게 찾아온다.
따라서, 이 5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무언가가, 사람이든 상황이든 감정이든 무엇이든 그것이 내게 왔을 때는 이유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비물질포함)은 자기가 가는 길이 있다. 계속 예를 드는 '두통'이라는 비물질도 자기 가는 길목에서 나약한 나를 지나다니게 되는 것이다. 두통이 편하자고 날 택한 것이다. 두통이 낸 길목에 내가 있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총량대로 그것 역시 그것이 가는 길에 나를 지나가야 편하고 수월하고 빠른 것이다.
문제는
내게 온 그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무지하여 해석하지 못하는 나,
알면서도 계속 발목묶여 있는 내가 문제인 것이다.
발목의 밧줄을 풀어내는 것도, 길목에서 비껴나는 것도 모두 내 몫이라는 말이다.
묶인 밧줄을 푸는 것, 길목에서 비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각'이다.
그 모양새로 내게 온 것들은 내게 '자각'시키기 위해서 온다.
나약한 나를 단단하게,
부족한 나를 채우려고,
둔감한 나의 감각을 열려고,
멍청한 나의 뇌를 세척시키려고 그들이 오는 것이다.
용기가 없다고, 의지가 약하다고, 자신감이 없다고, 내 성질이 어떻다고
자기 자신에게 불만과 불신과 불안을 가득 채워서는 안된다.
감정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저것이 내게 이렇게 해서, 그것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환경이 그러니 할 수 없이 하면서
자기통제밖의 상황, 시간, 현상에 '탓'을 돌려서도 안된다.
이 역시 비겁, 비굴함만 가중시키는 감정의 해석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러한 자각이 쉽지 않다. 그럴 땐 이렇게 해석해보면 된다.
전자는 감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자신을 더 들여다 보게 하기 위해
후자는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알았으니 통제가능한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려 능력을 키우기 위해
그렇게 미운 대상들이 내게로 왔구나...하고.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내게 오는 많은 '부정'의 옷을 입은 사람, 사태들에서 이 5단계를 활용하는 것이 굳이 '의식'을 해야 치러낼 정도로 능숙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방법'을 알았다는 것이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정도의 노련함은 가진 것 같다.
뭐가 본질인지 몰라서 내게 쳐들어오는 감정에 정신이 쩔쩔매거나
내 통제밖의 것에서 탓, 체하며 안달내거나
부족한 자신만을 탓하며 눈물 흘리고 있는 나는 이제 아니다.
이 5단계를 더더욱 연마하기 위해 나는 오히려 '부정의 옷'을 입은 사람과 사태가 내게 오는 것을 반기기도 하니까.
죽을 때까지 인간은 부정을 안고 살아야만 한다. 좋은 일만, 꽃길만 걷는, 늘 행복한 이는 없다. 나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훈련이 반복반복된다면 내게 오는 '부정의 옷을 입은 모든' 것들로부터 그 '진가'를 발견하고 오히려 '감사'할 줄 아는 조금은 멋진 어른으로서의 내가 되지 않을까 살짝 멋진 나를 상상해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