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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04. 2024

타인의 고통앞에서만 미소짓는
'질투'

나는 나의 장난감이며

나의 인생은 내 임상실험장이다.


오늘부터 나는 지금껏 내가 내려놓지도, 잘 다루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나의 감정들을 파악, 분석, 분류, 연계, 추출, 혼합, 용해를 시도하려 한다. 내가 가장 내려놓기 어려웠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렇게 물으니 이제는 내려놨다는 의미가 되네. 그렇다면, 지금도 여전히 날 괴롭히는 감정은 무엇일까? 


본 브런치북을 통해 현재의 내가 지닌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신나게 놀아보려 한다.  


매일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나지만 독서토론, 코칭, 그리고 나와 수시로 대화한다. 


대화가 오가며 감정주파수의 진동이 감지되는 지점은 '자신의 변화'를 얘기할 때 격해지고 그만큼 행복하다. 내게서 추천받은 책을 읽고 함께 공감하며 대화가 오고갈 때 역시 내 주파수의 진폭이 큰 것을 보면 대화가 통하는 이들과, 삶의 격을 논할 때,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소망이 솟구치고 야망이 들끓고 희망이 어렴풋이 보이는, 그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반면, 내 주파수가 바닥에서 약한 진폭으로 겨우 떨고 있는 지점도 있다. 상대의, 그리고 나의 심정에서 '자만'이 느껴질 때다. 제 아무리 칭찬이나 회유, 미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표현했더라도 자만이 느껴지는 순간, 내 맘 깊이에서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슬슬 고개를 쳐든다. 다짜고짜 남들을 비난, 비방하며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초면에 내게 조언을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경우도 있다. 


음.. 이럴 때 나는 상대에게 미소지으며 경청하는 듯하지만 솔직히 내 안의 내가 어떠한지 난 금새 알아챈다. 상대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 또한 비난하는 상대를 못마땅해하거나 똑같이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이는 내게서 자만이 출동했음을 의미한다.  

잘 들어주고 수용해주고 그럴 수도 있지. 라는 표정속 내 감정은 남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 자신을 속이지는 못한다. '네가 뭘 알아?'하며 비아냥대기도 하고 '그런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리도 신랄하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지?'싶어 질투도 난다. 


나의 내면은 이성에게 들통나는 순간, 내가 칭찬할 수 있도록, 혹은 비난할 수 있도록 정해진 인간의 삶은 없는데(주1)도 불구하고 나의 자만이 고개를 쳐들어 상대를 비난할 태세를 벌써 갖추고 있다. 


상대의 자만이 내게 전염된 것인지, 

상대와는 별개로 내게 언제든 고개를 쳐들 자만이 준비되어 있는지,

아니면 상대의 자만이 나의 자만을 불러와 서로 맞짱을 뜨려는지.


여하튼 상대의 자만을 비난하는 내 자만이 시작되는 순간, 나의 에너지 주파수는 바닥을 친다. 

아... 아직도 멀었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과 내면의 삶이 일치한다고 믿습니다.(주2)'라고 당당하게 고백한 소로우처럼 나도 그런줄 알았는데 이런 자각이 일면 난 여전히 나의 마음가짐과 인격의 곤궁에 속상하고 이런 인격으로 과연 질높은 글을 쓸 수 있을까에도 의심이 인다.

 

의심은 믿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는 의미이고 또 의심은 믿음을 여러 갈래로 나누기도 한다. 

의심이 드는 그 지점이 내 믿음의 강도수준이자

의심이 나눈 갈래가 내 지성의 명도수준이다.


감정은 내게서 너무나 열일한다. 감정이 내게 오는 목적은 '자각'을 위해서이니 할일 제대로 하고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내 이성, 그러니까 더 크게 정신은 나의 심연속 못된 녀석을 어떻게든 변화시켜내야 할 숙제 앞에 나를 앉혀 놓는다.


상대를 비난하려는 못된 심정은 상대보다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들키기 싫은, 나아가 상대도 나만큼 못나지기를 바라는 질투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질투는 상대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되겠지만 그 이면을 가만... 히 들여다보면 '나보다 더' 가진, 잘난, 높은 상대를 어떻게 해서라도 나와 비슷하게 끄집어 내려 나와 비슷하게 만들려는 못된 심보에서 출동하는 감정이다. 있는 그대로 박수쳐주지 못하고 '척'속에 숨어버리는 비겁한 녀석이기도 하다. 


결국, 질투는 

'될 있는, 해낼 있었던' 나에 대한 미련과 나태이며

'네가 감히 날 건드려?'하며 따지지도 못하면서 은근슬쩍 감정을 내비치는 비굴이며

'네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거든'하며 과도한 자기평가에 길들여진 허상같은 자만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상대보다 낮게 평가하여 스스로의 못남을 자극해 걱정을 산출하고

어디 털어놓을 데도 없는 걱정을 들킬새라 자기안의 보석은 외면한 더러운 쓰레기들만 잔뜩 정신 속에 넣기로 작정한 못된, 사악한 녀석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왜 나를 찾아왔을까?

내 안의 열등감이 자기를 봐달라는 신호를 보낸 걸까?

내 안의 자격지심이 이제는 좀 나아졌냐고 질문하는 것일까?

내 안의 죄책감이 이제 세상에 떳떳해도 되냐고 확인하는 것일까?


질투는 상대로부터 느꼈지만 결국, 내면의 열등감, 죄책감, 자격지심, 미련, 연민, 후회와 같은 감정들이 연합하여 자기를 봐달라고, 자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이제 이 어둠에서 날 해방시켜 달라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질투가 시발된 그 지점이 나의 지성과 결핍의 현주소다.

이러한 '자각'이 '질투'를 몰고와 날 일깨울 목적이었던 것은 알겠지만 혹여 이러한 해석에 무능하거나 나태하여 자각을 불러오지 못하면, 질투는 분명 자기과시를 위해 허영과 포장과 과대평가로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전락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앞에서만 미소짓는(주3)' 추잡한 속성을 드러내 버렸을 것이다.


'제대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너무나 넘치는 자산이다.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스스로로서 존재케해주는 존재감이며 자신의 현위치를 알게 해주는 지표와도 같다. 


어느 누군들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내가 더 낫길 바라는 마음이 없겠는가.

어느 누군들 싫은 말 듣기 싫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어느 누군들 못난 모습 들키기 싫고 잘난 면만 내보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분명 이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마음을 알아챘음에도 시정, 수정, 정정, 변화시키려는 의지나 행동이 없다면 죄로 이어질 또한 분명하다.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수는 없지만 잘못을 통해 자각하지 않는다면 무지하거나 어리석거나 본성이 사악하거나 자기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없겠다.  

나는 나를 임상삼아 내 깊은 내면에 어떤 감정들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지를 탐색한다. 이러한 탐색과 탐구가 철학적 논의로 이어지면 좋겠다. '철학적 논의는 자질이 없지 않은 젊은이의 영혼을 만났을 때 뱀보다 더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는 법(주4)'이라니 


내 영혼이 철학에게 자질을 검증받아 날 외면하지 않도록 나는 더 배워야만 하겠다. 

배움이 날 철학으로 이끌 것이니, 

그렇게 철학이 뱀보다 더 질기고 지독하게 날 물고 늘어지길 바라니, 

그렇게 내 인생이 조금 더 깊고 진지하길 바라니,

그렇게 내 영혼의 순도가 영속적으로 맑아지길 바라니.

 

아울러 

나를 임상삼아 탐구하는 이 과정이 나의 변화를 너머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에게 이롭기를 바라니.... 



주1>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래스, 민음사.

주2>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헨리데이빗소로우, 오래된 미래.

주3> 질투의 신 인비디아 :  인디비아는 햇빛은 커녕 바람한점 불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살며 늘 창백하고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고 지독한 사팔뜨기이며 치아는 군데군데 썩어 있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데 이러한 인비디아의 입술에 미소를 감돌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이 고통받는 광경뿐이다. 또한 인비디아는 잠을 알지 못한채 밤낮으로 걱정에 쫒기다 남의 좋은 꼴을 보면 속이 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날이 야위어간다.(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의 내용)

주4>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문예.


[건율원 ]

https://guhnyulwon.liveklass.com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지배]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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