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브런치북은 '나는 나의 장난감이며 나의 인생은 내 임상실험장'이라는 본질에 맞게 나 스스로 지금껏 내가 내려놓지도, 잘 다루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나의 감정들을 파악, 분석, 분류, 연계, 추출, 혼합, 용해를 시도하는 글입니다. 본 브런치북을 통해 현재의 내가 지닌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신나게 놀아보는 중입니다!
새벽독서모임을 함께 하는 동반자(주1)께서 주말 새벽, 너무나 가치있는 강의를 해주셨다. 누구나 경제적자유를 꿈꾸며 자신만의 컨텐츠를 SNS에 알리고 싶어하지만 나같은 아줌마가 후킹(?)으로, 구독자를 모으고 이것을 다시 돈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실현시키기는 참으로 소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 역시 유투브와 인스타계정도 있고 한때 나 좋아서 그냥 업로드했던 경험은 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지인의 강의는 정말 내가 얼마나 대책없이, 무지하게 그 귀한 시간을 허투루 썼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알게 했다. 무조건 '열심히', '매일' 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나같은 사람은 SNS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물론 이 허투루의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 새벽의 강의가 쏙쏙 와닿았고 '이렇게 하면 안되는구나'도 알게 됐으니까 허투루가 허투루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재능기부로 이뤄진 오늘의 강의는 나의 '단념'을 '결핍'으로 변화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난 SNS바보라고 스스로 진단, 규정해버리고 글만이라도 잘쓰자로 맘을 굳혔었다. 그렇게 나는 노트북속 한글파일에 글을 쓰고 -> 브런치에 옮기고 -> 네이버프리미엄컨텐츠에 가공해서 올리고 -> 유북에서 미니북으로 재편집해 발행한다. 원석(노트북 속 원글)을 글 플랫폼의 구미에 맞게 가공, 변형, 변신시키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고 이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기에 나름 만족하고는 있지만
얼마전부터 문득 이런 생각이 자꾸만 내게 치고 들어왔다.
'내가 글로 먹고 살기로 다짐했지만 요즘 세상에서 글만 주구장창 쓰는 걸로 될까?'
갑자기 허수아비가 된 듯했다. 마냥 두팔 벌리고만 있지 저어기의 참새는 쫒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이 배꼽 언저리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 신기하다. 궁해서 찾아진 것인지, 찾는지도 몰랐는데 운좋게 얻게 된 것인지 내가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지인이 자신이 발을 들이기 시작한 유투브의 성공사례를 나와 공유해주겠다고 제안하신 것이다. 그 분은 IT방면 전문가로서, 개인의 컨텐츠를 만들며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직, 간접경험으로 알고리즘에 대한 파악이 끝난 상태에서 자신이 직접 실험하여 단 7개의 숏영상으로 단 1주일만에 구독자 1천명을 모았다. 물론 철저한 기획단계에서 50여일을 소요했다. 그리고 수익이 발생했다. 즉, 60여일간 50일은 기획, 10여일의 실행이 초행자로서 기가막힌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링컨(주2)처럼.
강의를 듣는 내내 난 유투브의 구독자를 모으는 그의 노하우를 배우는 것도 좋았지만
사실 더 큰 것을 깨달았다!
바로 결핍과 단념의 차이!
나는 '결핍은 부족한 것이라 채울 수 없는 것. 그러니 단념할 수밖에 없다'고 규정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결핍인 것을 알면 무지 속상하다. 가진 자가 부럽기도 하고 배우고 싶고, 하지만 '어차피 배워봤자 난 못할텐데'라는 스스로에 대한 한계에 발목잡혀 나는 결핍을 쉽게 단념하기 위한 유리한 무기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강의를 통해 나의 지난 단념을 결핍으로, 결핍을 도전으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
결핍이 있지만 단념만 하지 않으면 이는 현재에 국한될 뿐이다.
결핍이 있다고 단념까지 해버리면 이는 미래까지 영원히 없앤 것이다.
결핍은 현재,
단념은 미래.
자신의 미래를 결핍이 속상하고 부럽다고 막고 서 있는 자는 다름아닌 나였다.
오래전에 내게 SNS는 버겁다고 브런치에 글로 고백한 적도 있듯이 진짜로 내게 SNS는 넘사벽이다.
거짓없는 나의 감각은 SNS세상에서는 오만가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하품할 줄 모르는 부지런하고 깐깐한 이성은 3초에 승부를 거는 유투브나 인스타로는 도저히 표현할 재주가 없어서 나는 단념해버렸던 것이다. 사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내게 과연 SNS만 결핍이었을까?
천만에! 이 외에도 수많은 결핍이 있다.
이 결핍을 연역해보니 내 안 깊숙이에는 자격지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도 알아냈다.
부족하고 모자란들 뭘 어쩌겠는가?
그 부족과 열등이 지금의 날 만든 것인데!
이것마저 없었으면 그냥 그렇게 부족한지도 모르는 바보로,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둔자로 살았을텐데
부족한 게 뭐 어때서?
삶의 가치와 관련된 문제에 접근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삶의 바깥에서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으면서 지금 살고 있는 나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물 속의 물고기가 바다의 전체를 알 수 없듯이
내 삶이 현재진행형인 상태라면 난 내 삶을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결과로 내 결핍을 단념하는 처사는 아주 내 삶에 건방진 태도다.
내가 나의 가치를 평가하려면
나를 전혀 모르는, 또는 나를 포함한 모두의 입장에 서본 후에야,
아니면 내 삶을 다 살아보고 나서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판단하거나 나의 삶의 가치를 논하는 접근은
정말 '모르는 게 뭔지 모르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해야하는' 것이거나 '하고 싶은' 것에서
나의 결핍을 '무능'으로 평가해버리고 '단념'의 근사한 이유로 만들어낸 것이다.
단념은 외면이었고 회피였다.
물론, 살다가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그것을 안하는' 선택도 있는데 난 아예 그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한 결핍이었다면 다행이다. 그것은 현재일 뿐이고 결핍을 지니고 살면 되니까.
그저 결핍인채로 약하면 약한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 하면 되니까.
그런데 단념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미래에도 영원히 해내지 못할 것이라, 안할 것이라,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라 결론내리고 사는 것이니 도대체 내 이성이 어디서 절뚝거렸는지, 어디서 하품하고 있었는지, 어디서 마냥저냥 한눈팔고 있었는지...
난 왜 결핍이 가는 길을 단념으로만 보낸 것일까.
음... 주원아, 괜찮다.
이제 '결핍'이 자유롭게 여러 길을 드나들도록 그냥 좀 냅둬보자.
네 이성은 필요없단다.
네 이성은 그저 익숙한 길로 빨리 도착하려 조급할 뿐이란다.
하지만 네게 찾아온 '결핍'이 다른 길로도 들어서려 한다면 그냥 좀 냅둬라.
물론, '결핍'이 새로운 길, 가령 '인정과 수용'이나 '시도와 도전'의 길로 들어설 때 너의 이성과 팔다리는 무지 괴롭겠지. 그래도 그냥 좀 냅둬보자.
그 녀석이 '단념', 그러니까 '포기'의 길로만 자기를 보내는 네게 원망이라도 퍼부으면 어쩔 것이냐?
그것이 가는 길목을 다 틀어막고 한길로만 내보내는 네 마음은 좋으냐?
그 '결핍'도 여러 길로 가봐야 가장 탁월한 하나의 길을 발견하지 않겠느냐?
그 녀석이 네 인생길에서 자기 맘대로 설치게 그냥 좀 냅둬보자....
그리고!
네가 뭐가 잘나서 결핍없이 뭐든 충분히 채워져 있다고 자만하느냐?
결핍이 과잉보다 낫다는데 한쪽의 과잉이 감사하다면 결핍에도 감사를 보내는 게 순리가 아닐까?
자만하지 말고 결핍된 그것이 과잉된 그것만큼 키워졌을 때 네 인생이 어떻게 진화될 지 생각해보라.
주원아...
혹여, '결핍된 채로 그냥 살련다.' 하더라도 괜찮다.
어찌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모든 것을 다 잘 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해야할', '부러운', '유리한' 것이라서 '결핍'이 널 키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닐까?
'결핍'된 그것이 '힘'이 필요하다고 네게 아양떠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네가 조금만 '힘'을 보태준다면 '결핍'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보상으로 널 키워낼텐데...
'결핍'에 감사해보자.
주1> 난 새벽독서를 함께 하는 분들을 '동반자'로 여긴다.
주2> '나에게 나무를 베는 데 6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날을 가는데 4시간을 쓸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링컨의 명언으로 무언가의 기본, 기초를 만드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