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브런치북은 '나는 나의 장난감이며 나의 인생은 내 임상실험장'이라는 본질에 맞게 나 스스로 지금껏 내가 내려놓지도, 잘 다루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나의 감정들을 파악, 분석, 분류, 연계, 추출, 혼합, 용해를 시도하는 글입니다. 본 브런치북을 통해 현재의 내가 지닌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신나게 놀아보는 중입니다!
'나는 의존적이고 이런 내가 너무 싫어요! 왜 이렇게 남들에게 기대려 하고 왜 이렇게 남들 눈치를 보고, 도대체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독립적이지 않은 것은 아닌데... 아주아주, 정말 말도 안되게 사소한 것들에서 너무 의존해요.'
나 또한 그랬다.
친구들이 우루루 만나자 약속한 날, 나와 제일 친한 친구가 가느냐의 여부에 따라 내가 모임에 참석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나 역시 스스로 모임의 본질을 떠나 그 친구의 걸음에 내 판단이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소소한 친구들 모임이야 그렇다치고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가정사의 중요한 판단앞에서도 나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뭐가 중요해? 00의 판단대로 따르면 되지' 했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런 나도 나고
저런 나도 나다.
내 안에는 아무리 빼내도 조금만 결핍되면 어떻게든 생기는 가래나 고름이 있듯이
내 정신에도 아무리 빼내도 약간의 결핍에 스스로 자생하는 어리석음과 그릇된 판단이 있고
내 감정에도 아무리 빼내도 나약한 정신만큼 출동준비를 마친 비굴, 비겁, 두려움과 자격지심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이런 모습도 나고
저런 모습도 나다.
하지만,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의존적이라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고 내가 나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매도하거나 비하하거나 그 감정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감정말고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를 비롯한 모든 현상에는 감춰진 또 다른 이면이 있음을 해석해야 한다.
'의존'이 존재하려면 '독립'이 존재해야 한다.
의존적이라서 독립적이지 않다?
독립적이라면 의존적이면 안된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이 둘을 다 데리고 어떻게 균형을 맞추는지, 어디가 어그러졌는지를 해석해내는 정신의 힘이 필요하다.
사람은 '생존'하며 '존재'한다.
생존은 외부로, 존재는 내면으로.
생존은 의존으로, 존재는 독립으로.
생존은 신체로, 존재는 정신으로.
생존은 함께, 존재는 홀로.
이렇게 인간의 존재는 be와 being이 상호의존적이어야 인간인 것이다.
따라서, 의존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외부로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며 그렇다고 해서 독립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호독립을 위해 서로 의존하되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독립된 개체이면 되는 것이다.
친구가 안가면 나도 안가고 친구가 가면 나도 가고.
내가 그 친구에게 '모임에 나가는' 결정에 의존하면 어떠리.
중요한 해석은 '그 모임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에 따라 친구가 가든 말든 내가 갈지 말지를 정해야 하는 해석이 부족한 것이지, 친구에게 의존하는 내가 나약한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다. 그 모임은 그냥 친구에 의해 결정해도 되는, 그런 모임인 것이다. 그러면 맘껏 의존하면 된다. 그렇게 의존하면서 맘껏 즐기고 오면 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내가 의존적이면 독립적이지 않으니 의존하면 안된다! 라고 여긴다면
혹여 내게 의존하려는 대상에게 '넌 독립적이지 않으니까 내게 의존하지마!'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존적'인 사람을 나약하다거나 독립하지 못한 부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내게 '의존'하려는 이도 그렇게 바라봐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의존하는 것이 독립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디에 의존하고 어디서 독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또한 의지, 의존은 '책임'으로 인한 욕구'가 방출되는 길이다.
책임이 요구되는 곳에는 대개의 경우 심판으로 정해진 처벌이 대동된다.
그렇다면 의지와 의존은 처벌을 두려워하는 심리도 작용한다고 볼 수 있고
이로 인해 스스로가 '책임, 즉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하려는' 목적을 띄고 있다고도 하겠다.
그렇다면,
책임지려는 욕구는 있으나
능력의 부족이나 죄책감의 강도가 심리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니
과연 어떤 부분의 죄책감이 내면에서 올라오는지,
어떤 능력이 부족한지를 해석해야지
의지의 약함이나 의존의 강함을 부정으로 몰아갈 필요는 없다.
가뜩이나 죄책감을 전제하는 의지와 의존인데
거기에 의존과 의지자체의 무능과 죄책까지 보태어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모른다.
나는 인정받길 원한다.
나는 혼자서는 두렵다.
나는 나약하다.
괜찮다!
이런 나이기에 내겐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에게 도움받고 그렇게 자신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키워진 나라면 충분히 나와 같은 누군가를 더 품고 더 포용하고 더 배려하고 더 챙겨줄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다.
진실되게 보이려고 더 길게 기도하고
인자해 보이려고 더 진한 미소를 짓고
열의를 보이려고 더 목소리를 높이고
사랑을 표하려고 더 멀리 손을 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심으로, 진정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보려는 노력이다.
부족하고 모자라고 나약한, 실수를 너머 오류투성이인 나지만
그게 어때서? 이런 나도... 나인데...
그 부족이 나를 부정하는 감정으로 가지 않고
그 부족이 날 키우는 해석으로 가다면
부족은 채워지고 나약함은 강해지고 오류는 바로잡힐 것이다.
이러한 성찰과 자각이
부족과 나약함, 오류가 내게 온 이유인 것을.
내가 나를 키워내는 것에 혹 버거울까봐 그런 상황, 사태가 내게 오는 것을.
나를 키워 어디든 쓰려 하는 더 큰 존재가 날 이리로 걷게 하는 것을.
그러니, 의존하려는 자신, 의지가 꺾이는 자신조차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내가 더 책임있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죄인으로 몰고 가지 않으려는 바둥거림이며
더 진실되게 자신을 드러내어 조금 자신을 키워보라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