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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11. 2024

외로움, 우울, 공허

본 브런치북은 '나는 나의 장난감이며 나의 인생은 내 임상실험장'이라는 본질에 맞게 나 스스로 지금껏 내가 내려놓지도, 잘 다루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나의 감정들을 파악, 분석, 분류, 연계, 추출, 혼합, 용해를 시도하는 글입니다. 본 브런치북을 통해 현재의 내가 지닌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보며 신나게 놀아보는 중입니다!


계절의 변화라곤 그저 꽃이 피네, 더워지네, 추워지네 정도외엔 별 감정없이 살아온 나였다. 남들처럼 봄되면 꽃구경가고 가을되면 단풍구경간 경험이 내 인생에 한번도 없었던 것을 보면 난 계절에, 자연에 무디고 둔한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이랬던 내가 '가을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느낌이 이는 것이 내게는 대단한 변화다. 왜 대단한 변화인지를 말하기 위해선 부끄럽지만 나의 내면의 빈곤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참으로 민망하고 어리석게도 난 수년간 공허함과 외로움, 우울을 안고 살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왜 난 이리 건강한거지?'하며 말도 안되는 불만으로 시작하여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다.'며 얼른얼른 하루가 가고 빨리빨리 나이들고 싶었다. 그만큼 세상사는 재미도 의미도 갖지 못했던, 인생이 빨리빨리 흐르기만 바라던 시간들이 한참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엔 혼자 붙박이장속에 들어가 앉아 있기도 했다. 그 곳에 있으면 세상이 날 보지도 못하고 나 역시 아무것도 안 봐도 될 것 같아서였다. 키 170인 내 몸무게는 당시 급격히 줄어 40kg으로 뼈만 남긴 적도 있었고 분명 내 눈에는 인파선있는 곳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부어있었고 숨쉬기도 힘들었는데 병원에서 초음파를 하면 아무 것도 없다 해서 도대체 이 아이러니가 뭔지를 풀지 못했던 그 긴 시간들. 


이런 민망한 시간을 수년보내고서 그리로부터 또 수년이 흐른 지금.

나는 명쾌해졌다.


왜 '가을을 느끼고 있다'가 대단한 변화냐면, 

'사랑받으려고, 인정받으려고, 함께 하려고' 애썼던 내가

'사랑주려고, 인정해주려고, 함께 해주려고' 넘치는 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내 속에 내가 없어서 무언가로 관심을 줄 수 없는 나였지만

이제 내 속이 나로 채워져 관심을 줄 힘이 생긴 내가 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리도 애쓰고 사는 데 왜 날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지? 이것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이렇게 가까운 너한테도 사랑받지 못하는데 누가 날 사랑해 주겠어?'하며 자기학대 수준까지 스스로를 몰고 갔던 부끄러운 나였는데 이제는 아니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인정부터 존중과 사랑이 채워져 누구에게든 관심과 사랑을 줄 힘이 생겼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마라스무스병. '소모되는 병' 

어쩌면 나의 증상은 그 병의 긴 앓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신체적인 영양결핍으로 나타나는 질병이지만 정신과에서는 '매일 사랑을 고백하라'고 처방한다고 한다. 정신의 영양결핍으로 인한 신체적 질병으로 진단하는 것이다. 사랑을 원하기만 하니까 내 안에서 샘솟아야 할 사랑이 점점 소모, 소진, 소실되는, 그렇게 신체의 결핍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병. 그러니까 자기안의 사랑이 다시 기능하게 하기 위해 '사랑합니다.'를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은 자기 안에서 메말라가는 사랑을 다시 샘솟게 하는 펌프이자 수차(車)인 것이다.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원하던 사람이 

수년간의 지속적인 펌프질(내겐 책과 글이었다)로

사랑을 굳이 원하지 않아도 될만큼 내 안의 사랑의 수차가 돌아가는, 

혹여, 다시 메말라갈 때 마중물 한바가지면 어김없이 콸콸 쏟아지는,

그렇게 마르지 않고 넘쳐서 사랑을 줄 수 있는 힘까지 얻은 것이다. 


골을 넣을 뻔했던 것과 실제 골을 넣는 것은 다르다.

내 손에 잡힐 뻔했던 것과 실제 내 손에 잡은 것은 다르다.

알 것같은 것과 실제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들은 감정이고 후자들은 행동이다.

전자들은 0이지만 후자들은 상수이다.

전자들은 추상이고 후자들은 현상이다.

전자들은 미련이고 후자들은 확신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외롭고 우울한 지경으로 몰고 가는 감정과의 사투는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거나 정신훈련을 위해 해야할 실천이 반복되는 행동의 지속으로

나의 인생을 다른 경지로 몰고 간 것이 분명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끼리끼리의 사랑놀이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겐 미워하지 말라, 사랑해달라 갈구하는 비굴한 사랑놀이가 아니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 속에서 사랑이 넘쳐 흘러 스며들게 하는, 나 자체가 사랑이 되는 그런 사랑놀이가 

이제 시작되었음을, 그렇게 내 임상실험이 검증되었음이 '아. 가을이구나...'를 나도 모르게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면서 감지된 것이다.  


외로움은 두 갈래의 길 앞에 자신을 세워둔다.

하나의 길은 

자기 내면의 소실을 알아채지 못해 외부로부터의 갈구만 늘어가 결국 스스로를 더 공허로, 자기상실로, 우울로 빠뜨리는 길.

다른 하나의 길은 

자기 내면의 요구를 알아채 외부가 아닌 자기 속을 스스로 채울 수 있도록 동력을 제공하여 굳이 애쓰지 않아도 채워지고 흘러넘쳐 외부까지 스며들게 하는 길. 


결국, 외로움이나 우울, 공허와 같은 감정은 

외부로 시선을 돌려야 할지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지, 

감정에 집중해야 할지 정신에 집중해야 할지 선택의 시점에 자신이 서있음을 의미한다.


사람, 놀이, 일로 채워가는 외로움은 일시적인 이탈이며 더 짙은 외로움을 곧바로 등장시키는 반면

정신으로 채워지는 외로움의 질은 분명 다르다. 

응당 정신으로 채워진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고독'일 것이며

'고독'이 '사유'로 안내하기에 충분한 기능을 지녔으니

외로움은 사유로 날 이끄는 훌륭한 안내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안내자를 위하여 나는 더 '혼자'여야만 할 것이 아닌가...



'외로움'의 습격은 '스스로로 가득 채우라'는,

아니 어쩌면 '이제 자기로 자신을 채울 때'를 알려주는 신호인 것이다.


오로지 자신으로 채워져 자신으로 흘러넘치는 분수처럼 살라는 릴케의 표현처럼,

태양도 혼자이고 하느님도 혼자이지만 악마만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니 홀로 고독하라는 소로우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만 완벽히 조화로울 수 있고 이는 고독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처럼. 

나 역시 나로써 채울 수 있는 시간위에 내가 서 있다는 신호가 아니었던가.


과거의 나는 사람이 싫어 혼자를 택했고

지금의 나는 혼자를 택해 사람이 좋다.


과거의 외로움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 내가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에 택한 외부로부터의 고립이었다면

지금의 외로움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외부로부터 어떤 장애가 주어져도 내 존재위에 내가 서 있다는 단단함의 고립이다.


과거의 외로움이 우울과 공허의 진격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기력을 동반했다면

지금의 외로움은 공허의 빈곳에 우울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 속에 채울 것을 찾는 분주함을 동반한다.


나는...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하여 날 시골로 옮겨놨다.

이 속에서의 외로움은

그렇게 내게 친구보다 다정하게... 

오랜 시간 방치했던 내 오래된 친구인 나의 자아를 만나게 이끌어주는 소중한 감정이 되었다.  


[건율원 ]

https://guhnyulwon.liveklass.com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지배]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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