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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Nov 14. 2024

정신의 두려움을 떨치려면.

Encore '엄마의 유산' - 12번째 편지

좋을 땐 누구나 좋지. 하지만 안 좋을 때, 

그런 상황이 네 앞에 등장했을 때, 

그 때 어떻게 네 정신이 활동하는지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지. 

안좋은 사태가 네게 등장하면 항상 갈림길에 놓였다고 여기면 돼. 

용기를 내든, 

두려움에 벌벌 떨든, 

정면으로 맞서든 비겁하게 피하든, 

선택하는거야. 


안 좋은 일이 생긴 것은 

선택해야 할 때. 

즉, 노선을 점검할 때라고 해석해야 해.     


자, 사태앞에서! 

너의 정신에게 이렇게 명령하길 바래. 

'메세지를 찾아라.'

드디어 보물찾기 한판이 벌어지는 것이지!!!    


널 두렵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외면하고 싶은... 

그러한 모든 것에는 자연의 숨겨진 의도가 있단다. 

'메세지를 찾는다는 것'은 

곧 자연이 그 사태를 지금, 네게, 일으킨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게임이야. 


어떤 의도든 그 의도를 찾고 이유를 연역으로 알아가 보렴. 그 이치를 네가 안다면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무언가로부터 인과된 메세지로서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 지금 벌어진 일의 본질을 보게 되지. 모든 현상은 '추론'이나 '유추'보다 '해석'의 힘으로 이해되고 해결되거든!  '현상을 현상으로 보지 않는 힘'은 감각이 전해준 메시지를 감정에 의존한 채 해석하지 않는 이성의 힘이야. 결코 흥분해서 판단의 오류를 만들거나 그릇된 해석으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거야. 


이는 어떤 일에도 다 해당된단다. 

널 기분좋게 흥분시키는 일에서도, 

널 가혹하게 벌하는 일에서도, 

널 불안에 떨게 하거나 잠못이루게 하거나 

저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진 느낌이 들게 하거나... 

모든 상황에서 자연은 널 위해 어떤 이유를 담은 쪽지 하나를 숨겨두지. 

항상 그것을 찾아서 펼쳐봐야 해. 

그 쪽지엔 황금보다 귀한 보물이 담겨 있어. 


안 좋은 일이 인생에 쑥! 등장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감정부터 상하지. 

불안해하고 심지어 이 사단이 왜 일어난건지 두려워하지. 

겁부터 내. 하지만,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절반이 안 좋은 일들일텐데 이들의 모양새는 다 다르겠지만 

어느 것 하나 예외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달고 와. 

패키지야. 

그리고 너의 감정부터 겨냥해. 


'미운 사태 VS 너'


화살을 날리는 주체는 '미운 사태'이고 과녁은 너의 감정이야. 그러면 일단 피하고 보려는 게 사람의 본능이야. 그런데 불안이나 두려움은 피해지지 않아. 결코 없어지지도 않아. 그러니까 사태를 보지는 못하고 감정만 부풀려져. 


두려움의 다른 면을 봐봐. 

두려움이 있어야 흥분된 정신을 잠시 진정시킬 수도 있거든.

두걸음 갈 것을 한걸음만 가게도 하지.

두려움은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감정이야. 


하지만 뭐든 과하면 사단이 나는 것처럼 그 녀석 힘이 너무 강할 때 너는 제압당해. 

한걸음도 내딛지 못해. 

결국, 

두려움과 맞서려 하지 말고 두려움을 달래주고 두려움과 손잡고 가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치를 깨닫는 방법외엔 없단다. 

이 말을 명심하길 바래. 

엄마는 이 진리를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에게 배워 확신을 가졌지. 그는 '정신의 두려움은 빛이 아니라 이치로써 떨쳐버릴 수 있으니[1].'라고 했어. 


진리를 따른다면 두려움을 없애려, 극복하려는 수많은 에너지의 수고와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을거야. 그 에너지와 시간을 이치를 깨닫는 곳으로 사용하렴.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한 자연의 숨은 의도를 찾는 쪽으로 네 정신을 쓰는 것에서 얻어질거야. 


두려움을 떨치려 두려움에 관심을 계속 갖는 한 관심받는 그 녀석은 더 덩치를 키우니까 방향을 완전히 바꿔서 네 정신은 보물을 찾는 것에만 사용하길 바란다. 또 한번 더 강조하지만, 이치를 안다는 것은 곧 자연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야. 


이치.란 논리적이거든. 네 이성이 연역적으로 그 이유를 찾아가면 돼. 

감정에 먹이를 주지 말고 이성에 먹이를 주란 말이야. 

담장 밑에 숨겼는지 지붕 위에 숨겼는지 계속 찾다 보면 발견되어지고 발견되면 그 다음 녀석도 찾게 되고 결국, 네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지 않지. 아니, 숨겨봤자 찾아내니까 숨길 필요도 없지. 

 

이 말은 네 앞에 닥친 어떤 사태든 

남과 다른 해석, 

보다 진화된 해석으로, 

보다 고양된 높은 질서에 의한 해석으로, 

보다 깊이 들여다본 본질적인 해석으로 그 일이 네게 일어난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야. 


또 알면 알수록 찾는 애를 쓰지 않고도 쉽고 편안하게 해석이 돼. 

알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소유할 수 있거든. 

인간의 이성은 기존에 지니고 있던 로고스[2]가 새로운 로고스를 만났을 때 분출되고 생성된단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의미를 찾는 과정은 네가 더 명철하고 깊이있는 본질적 해석이 가능한 이성의 주인공으로 널 키워주는 것이야. 정말 귀한 보물을 늘 손에 들고 사는 것이지. 그러니 어떤 현상에서든 네 감정이 먼저 움직이게 해서는 안돼. 감정은 잠시 내버려두고 이성이 출동하도록 정신에게 네가 명령해야 해. 정신이 멀쩡한데 감정한테 패한다면 굴욕이겠지?  


여기서 잠깐 감정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말해주려 해. 

잘 들어야 할거야.  


너의 과거부터 지금까지를 죽.... 기억해 봐. 

두려움없이 살았던 적이 있었나? 

두려움이 지속되었던 적이 있었나? 

반면, 기쁨없이 살았던 적이 있었나? 

기쁨이 계속 지속된 적이 있었나? 


결국, 어떤 감정이라도 네게 들어갔다가 나간다는 것이야. 감정은 네가 강제로 없애지도, 주입시키지도 못해. 그저 네게 들어왔다 나가는, 예고없이 찾아오는 손님같은 거야. 나쁜 감정을 억지로 없애지도, 좋은 감정을 애써 숨기지도 못하잖아. 결국, 감정을 일으키는 주체는 네가 아니란 말이지. 만약 네가 감정의 주체라면 우울이나 두려움이나 불안을 네가 만들 필요가 없잖아. 감정의 주체는 네가 아니야. 감정은 어떤 사태에 따랄붙어. 그리고 널 조종하다가 자기 할 일 끝내면 그 자리를 다른 감정에게 이양하고 나가는 것이야. 느끼고 조절하는 것은 네가 주체이지만, 감정을 발생시키고 대체하는 것은 네가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네게 감정을 발생시키는 감정의 근원, 즉 주체 뭘까? 

사태야. 

현상이야. 


네게 일어난 사태가 네게 이 감정 저 감정을 마구 던지지. 너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걸 받게 되어 있어. 인간은 죽을 때까지 부정정서든 긍정정서든 다 지니고 살 수밖에 없거든. 오늘 하루만 보더라도 화가 났다가 가라앉았다가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계속 수시로 바뀌잖아. 이런 증상이 감정의 발생주체가 네가 아니며 현상과 함께 들어왔다가 나간다는 것을 증명하잖아. 사람은, 너는 무조건 감정에 노출되고 어떤 사태로 인해 기쁨도 슬픔도 네게 가는거야. 


자, 꼭 명심해야 해.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주체도 아닌 네가 너에게 찾아온 감정을 없애려, 다른 감정을 만들려 노력할 필요가 없어. 


손님이라고 했잖아. 그저 들어왔다 나가는 존재. 감정은 그렇게 너를 지나 자기 갈길을 가는 거야. 그 녀석 가는 길에 네가 필요했던 거지. '손님'이라는 속성이 원래 선물을 주고 가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하잖아. 감정도 마찬가지지. 때론 선물같기도 하지만 때론 해를 입히기도 하지. 그냥 그런거야. 주체가 아닌 녀석에게 힘쓸 필요 없어. 잠깐 들렀다 가는 녀석을 그저 데리고 놀다가 보내주면 돼.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든 함몰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지? 주객이 바껴서 손님이 네 집을 차지하면 안되겠지? 하지만, 우리는 두렵고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들에 못견뎌하지. 빨리 내쫒고 싶지. 하지만 그게 잘 안되지. 왜냐? 그걸 내쫒고 싶어서 계속 그 쪽으로 관심을 두니까. 빨리 잔뜩 먹여서 배부르게 하면 나갈까, 싫은 내색 팍팍 내면 나갈까? 싶겠지만 


그 녀석이 원하는 것은 '관심'이거든. 배불리 먹이거나 싫은 내색 팍팍 내거나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받는 한 계속 머무르려고 해. 그러니 관심을 끊어줘야 해. 그냥 알아서 놀다 가도록. 그러면 재미없어서 나가. 우리가 늘상 우울하지도 늘상 기쁘지도 않은 것이 그 때문이야. 예고없이 들어왔다가 예고없이 나가기 때문. 

 

자,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아침에 우울했는데 오후가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때론 반대의 경우도 아주 많이 경험했지? 그럼 우울이 기쁨으로, 기쁨이 우울로 이동하는 그 사이에 뭐가 있었니? 우울이든 기쁨이든 감정의 주체가 네가 아닌데 이러한 이동경로에 뭐가 있었냐구? 


바로 너의 행동이 있었어. 

우울했는데 그냥 하던 일에 집중했거나 기뻐 날뛰고 싶었지만 가야할 곳으로 향했거나 네가 감정에 따르지 않고 미리 정해진 또는 하기로 한 주.체.적.인 행동이 있었어. 그 행동이 감정을 밀어내는 거지. 그리고 그 빈 공간에 새로운 감정이 진입하는거야. 가령, 우울했는데 네가 오늘 하기로 한 프로젝트의 자료를 제대로 잘 만들었다면 '앗싸! 드디어 끝냈다!!' 쾌재를 부르지. 행동이 우울을 밀어내고 쾌감을 들인거야. 


즉, 감정의 이동주체는 행동이야.

조금 더 보태볼까? 


누군가는 우울할 때 우울을 달래려 커피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기도 한대. 물론 개인의 취향이고 시비(是非)하고 싶지는 않지만 좀 더 근원에서 따져보면 그러한 행위 역시 우울이라는 감정에 초점이 맞춰진, 우울에게 관심을 주는 방향으로의 행동이야. 같은 방향의 다른 행동일 뿐이야. 네게 들어온 우울이 나가는 것은 우울 자체가 결정하지 커피나 음악이 떠밀어서 내보내지 못해. 오히려 관심을 준 것이기 때문에 더 몸집을 키워. 그래서 또 다른 방법, 더 나은 방법을 자꾸만 찾다가 결국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우울증으로 병원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도들을 했겠니) 커피나 음악보다 다 찐한 관심을 주는, '약'이나 '상담', 심하면 술이나 중독성약물과 같이 외부에 의존해서 정신이 망각되도록 스스로를 해치지.


그러니 감정에는 '관심두지 않는 관심'만 가진다! 

그리고 행동을 하되 기존에 하려 했던, 

자신이 미리 정해놨던, 해야 하는, 

하고 있던 그 행동을 묵묵히 한다! 

부정 정서에 관심두지 않는 방향의 행동말야.     


지금까지 한 말 잠깐 정리해볼까? 

감정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감정은 나를 통해 자기 갈길을 간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니까.

손님은 선물을 들고 오기도 해를 끼치기도 한다.

감정은 내가 주체가 아니라서 내보낼 수 없으니 스스로 나갈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둔다.

감정의 이동주체는 행동이다.

단, 기존에 하기로 한 행동이어야 한다.

주인이 자기할일만 하니 머쓱해진 손님은 알아서 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감정이라는 손님은 곧 또 들어온다.


이제 루크레티우스의 말, '정신의 두려움은 빛이 아니라 이치로써 떨쳐버릴 수 있으니.'를 이해하겠니?  

  

자,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어? 이 일이 나에게 일어난 이유가 뭐지?' 

좋은 일이든 불쾌한 일이든 이 질문부터 습관적으로 해봐. 

그리고 하나씩 그 현상이 벌어진 사태를 연역의 줄기를 따라 거슬러 가보는 것. 

그러면 퍼즐처럼 맞춰져. 

이유, 즉, 근거를 알게 되면 깨닫게 되지. 

'아! 자연이, 세상이, 온우주가 나에게 (이것)을 알려주려 했구나!'라고. 


물론, 당시에 곧바로 알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지 않아서이니 그냥 한 켠에 내려놓고 지내 봐. 가깝거나 먼 훗날 어떤 현상과 딱! 마주하면서 그 이유가 드러나. 그러면서 퍼즐이 완성되는 쾌감을 느낄거야. 드디어 네게 온 미운 사태와 함께 따라온 감정의 이유까지 알게 됙 그 순간 그 밉게 와서 널 괴롭힌 모든 것들에 감사하게 되지. 


'왜 하필 저 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야?', '왜 하필 오늘 접촉사고가 난거야?', '왜 하필 나한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거야?' 등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하필' 이라면서, 현상을 부정하는 쪽으로 일단 시선을 보내. 불평부터 하지. 감정부터 혹은 감정만을 쓴다는 말이야. '불평', '불만', '비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어야 하는데'라는 '부정', 그리고는 그 일이 터진 것에 대한 '변명'에 심하게 '불안'하기까지.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는 별로 도움이 안돼. 'ㅂ'이 사는 동네는 바보동네야. 왜냐면 얘네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널 상실감에 빠뜨려. 


상황이나 현상에 불안해지면 이에 대한 방어기제로 현상을 부정하게 되고 부정은 불쾌한 감정을 통해 불평이나 불만섞인 언어와 행동으로 드러나며 이는 사실을 왜곡, 오류화시킬 가능성을 높여서 결국, 자신의 안전한 공간으로 비겁하지만 숨겨줄 수 있는 변명을 찾게 돼. 변명은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것이기에 옳게 포장되기 위해서 현상을 비난하도록 이끈단다. 왜냐면, 관계란 정당성의 대립이니까 대상을 비난 내지 부정하면 자신의 정당이 상승하거든. 비교에 의한 일시적인 상승은 곧 추락을 예고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신을 이끌지. 비난은 변명의 몸집을 더 강하게 키우고 수습이 안될 정도의 비굴한 아첨꾼으로 자신을 내몰아치고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되면서 결국 비웃음의 대상이 돼. 스스로 자신을 바보로 만든 것이지. 여기서 더 나아가 심연의 자아는 자신을 배신하여 바보로 만든 현실의 자아에게 보복하기 위해 강인함을 버리고 불쌍한 자아를 자처한단다. 이렇게 불쌍하고 부실하고 부진해진 심연의 자아는 현실의 자아가 무너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아를 부정하며 비애속에 자신을 가둔 채 현실적 자아와 심연의 자아를 분리시켜 버리기도, 더 악하게는 분절시켜 버리기도 해. 

무섭지...        


그런데, 이 모든 'ㅂ'을 다 합쳐도 이겨낼 수 있는 'ㅂ' 하나가 있어. 

'ㅂ'이 사는 동네에서 아마 얘가 가장 강력할거야! 

바로 '변화'야.


'왜 하필'로 시작되는 언어부터 변화시켜 봐. '무슨 신호지?', '무슨 메시지지?', '뭘 알려주려는 거지?'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는거야.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은 어떤 사태를 일으켜서 널 성장시킨단다. 사람들은 그렇게 길들여져 있는 것 같아.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나중에 알게 돼. 그 돌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었음을. 그렇게 우리는 길들여져 있으니 '변화'가 필요해. '왜 하필 저 돌이 내 앞에 있는거야?'라고 감정부터 출동시키지마. '나를 넘어뜨린 이유가 뭐지?'와 같은 수동적인 사고여야 해. 넘어진 김에 잠시 그늘에서 쉬면 되고 쉬는 동안 네가 그동안 고민하던 어떤 문제에 대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고 기가 막힌 우연이 네 앞에 기적처럼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신기하게도 그 길이 네가 잘못 들어서서 되돌아가야 할 길일지도 모르거든. 그 때 알게 되지. '아! 잘 넘어졌다', '신기하네! 어떻게 딱! 그 때 그 자리에서 넘어졌을까!'하면서 말야. 


엄마는 이런 경험이 아주 많아. 약속을 했지만 약속이 겹쳤을 경우나 갑자기 약속을 변경해야 할 때, '왜 이리 꼬이지?'라고 불평하지 않아. '이유가 있겠지'라고 그냥 내버려 둬. 그러면 신기하게도 상대가 먼저 전화해서 말하더라구. '교수님 죄송한데 제가 (이러이러해서) 약속을 좀 바꿔주시면 안될까요?'해. 신기하지? 그렇게 해서 굳이 내 쪽에서 먼저 미안할 일을 만들지 않게 되면서도 두 개의 약속을 오히려 더 편한 동선으로, 또는 회의내용에 따라 자연스레 연결되던 경험이 여러번이었어. 


또 어떤 이는 갑자기 아파서 중요한 회의를 놓쳤는데 본인 탓에 회사에 지장을 줄까봐 전전긍긍했대. '어떡하지? 왜 하필 오늘같이 중요한 날..!!'하면서 원망을 하다가 잠시 멈춰서 '일이 이렇게 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했대. 그런데 병원에 가서 초기암을 발견했지 뭐야. 이 외에도 아주 많아. 비행기표를 간발의 차로 구입하지 못했는데 항공사의 배려로 더 빠른 경유의 노선으로 탑승한 경우, 저 일을 내가 하고 싶었지만 못하게 되었을 때도 오히려 더 나은 조건의 일이 생기는 경우...


우리 인생이란 게 이렇단다. 다소 좁은 간격의 '시간'이나 '기간'으로 보면 이 모두를 단순한 우연 정도로 말할 수 있겠지만 긴 의미를 담은 '세월', '시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거 수년전의 그 '말도 안되는' 상황들도 '아. 이런 이유로 인해서 그 때 그랬었구나'를 깨닫게 돼. 그러니 어떤 모양새를 띄고 오더라도 네게 오는 모든 사태에는 부정의 옷을 입히지 마. 


그러니 명심하렴. 네가 관심을 갖는 쪽이 힘을 갖는다는 사실을. 손해본 것, 즉, 일어난 부정적인 사태에 불평, 불만을 표시하며 전전긍긍하거나 짜증을 부리는 쪽으로 관심을 쏟으면 부정인 그 사태가 힘을 키워. 


'신의 패권은 항상 한쪽이 무겁게 마련[3]'이어서 세상에 먼저 드러나는 면이 있지만 먼저 드러날 뿐 그 배후에는 평정을 위한 다른 쪽이 반드시 숨어 있단다. 지금 손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손해의 대립은 이익. 네가 모르는 한쪽에서는 그 '손해의 진가'인 이익이 자라고 있을텐데 그렇게 네가 손해에 관심을 두면 손해가 힘을 키우고 이익이 힘을 잃지. 그러니, 손해에 관심두지 않고 이유를 찾고 어디선가 너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이런 일이 생겼나보다...하며 침착하게 이성으로 해석하면 관심두지 않는 손해 쪽은 서서히 힘을 잃고 대립극의 이익이 힘을 키우는 것이야. 


그 이익이 바로 '쪽지에 적힌 보물'이야. 다시 말하지만 네가 관심두는 쪽이 커져. 걱정하면 걱정이 오히려 현실이 되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 불평불만할 일이 더 많아지지. 감정으로 대처하면 감정이 키워지고 이성으로 대처하면 이성이 더 활발하게 움직여 정신의 힘이 강해지지.    


치치거리고 툴툴거리는 너의 표정과 말투는 그래서 중요해. 표정이나 말투, 글과 같은 것은 네가 세상을 향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내보내는거야. 부정의 에너지를 내보내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랑 비슷한 친구들을 잔뜩 만나서 힘을 키우고는 다시 자기가 태어난 곳, 너에게로 오지. 아까 말한 그 'ㅂ'들이 사는 동네말야. 거기서 잔뜩 패거리를 만들어서 네게로 다시 돌아와. 반면, 긍정의 에너지를 내보내면 이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친구를 데리고 네게로 가. '설상가상'이란 말 알지? 안 좋은 일이 겹쳐서 일어나고 좋은 일도 '겹경사'라는 말처럼 겹쳐서 일어나는 법이야. 모두 네가 어떤 에너지를 세상에 보내느냐에 달려 있어.


자연은 결코 너를 무균실에서 키워주지 않아.

사태를 겪게 함으로써 오히려 안전하게 너를 보호하고,

난관과 장애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극복의 힘을 키워 한계를 넘게 하고

기울이고 미끄러 뜨리면서 오히려 균형을 잡게 하며,

곤란과 소란을 던져줌으로써 오히려 영속적인 평온을 깨닫게 하고

공포스런 현상으로 오히려 널 용기있게 만들지.


그렇게 자연은 널 가르치며 자연 스스로도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모든 인간이 자연의 실험실에서 이리저리 굴려지고 내팽개쳐지고 그리 사는거야. 이 세상 어떤 누구도 무균실에서 아무런 고통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 없어. 그래서 네가 해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이면에 숨겨진 자연의 의도'여야 해. '나에게 벌어진 이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에 대해 고찰하는 이에게 자연은 항상 길을 알려주고 길을 터주고 그 길을 가는 방법까지 자연답게 슬쩍슬쩍 던져준단다.


그리고 또 하나, 총량이라는 게 있어.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희노애락에는 각각 다 총량이 있어. 어떤 누구도 평생 기쁘게만, 평생 괴롭게만 살지 않는다는거야. 안 좋은 일도 자기 모양새대로 무언가를 하려고 그리 부지런히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고 좋은 일도 마찬가지고. 어려서 고생 많이 한 사람이 나이 들어서 삶이 활짝 피는 경우도 있고 또 반대로 너무 귀하게 자란 이가 오히려 엄청난 고통을 겪기도 하지. 네게 안 좋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앗싸! 고통의 총량이 줄었네!'하면서 감사하길 바란다. 어떤 이유에서든 갑자기 인생에 쑥~ 끼어든 부정적인 사태에 대한 해석은 그렇게 자연이 계산한대로, 너를 더 너답게 살게 하기 위해 네 인생에 쑥! 끼어든거야. 


하지만 지금 이 편지에서 언급한대로 사고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인드야. 마인드, 즉, 정신이 그렇게 이성을 움직이는 쪽으로 힘을 기르면 기를수록 아까 말한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어져. 그래도 'ㅂ'이 너의 감정에 진입한다면 '변화'를 즉시 떠올리고 '메세지가 뭐지?', '이건 무슨 신호지?', '내가 뭘 바꿔야 하지?' 하며 습관적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이유를 찾도록 연습해 봐. 연습은 반복이고 반복은 습관이 되며 습관은 너를 완전히 변화시켜. 이렇게 습관이 된다면, 너는 사태에 함몰당하지 않고 네 인생 갈길 제대로 갈 수 있는 주체적인 네가 된단다. 네 인생에 무섭게, 두렵게, 낯설게 등장한 모든 사태들도 다 자기 가야할 길에서 너를 통과해야 하기에 네게 잠시 머문 것이야. 


엄마가 네게 주고 싶은 유산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주고 싶은 것이 

주체적으로 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엄마의 경험이야. 

더 질높고 격있는 경험을 주기 위해 엄마도 오늘 거론한 내용을 훈련할거야. 

그리고 네게 보여줘야지..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니까...    


[1] 사물의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2012, 아카넷

[2] 로고스(logos) ;  언어(말), 진리, 이성, 논리, 법칙, 관계, 비례, 설명, 계산 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그리스어로, 그 어원은 '말하다'(혹은 '말한 것')에서 나왔다. 로고스는 일상적 언어에서 차차 이성, 사유, 정신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기능과 관련된 개념으로 발전.[네이버 지식백과] 

[3] 그리스 철학자 소포클레스의 말, 그리스철학자열전(동서문화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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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제안하기]로 성함과 연락처, 내용, 모임의 성격 등을 알려주세요.


3. '엄마작가', '아빠작가'를 기다립니다!

엄마의 유산은 계승이 목적입니다. 저와 함께 '엄마의 유산2'를 이어가실 엄마작가(초보자라도 상관없습니다.)들, '아빠의 유산'을 써주실 아빠작가님들을 기다립니다.[작가에게 제안하기]로 메일주세요!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반전]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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