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re '엄마의 유산' - 13번째 편지
지난 주말미사중에 엄마가 딴생각에 빠져 있는거야. 분명 엄마는 두 손을 모으고 바른 자세로 신부님강론을 듣고 있었는데....
외형은 아주 착실한 신자인 듯 보이지만
엄마의 정신은 딴짓하러 탈출했더라구.
순간...
참.. 양심없다... 겉과 속이 다르다니...
참.. 비겁하다... 신께서 너를 초대하여 이리 성찬을 베풀고 있는데 넙죽 받으려고만 하다니...
참.. 비굴하다... 머리로는 딴생각하면서 겉으로는 그래도 점잖게 보이고 싶었나보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미사에 전념하려 했지만 늘 말하듯 촐싹맞은 정신이 들락날락대며 엄마를 괴롭혔어. 그래도 정신과 싸우며 미사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엄마의 양심(良心)에 어디가 고장났는지, 어디가 부실한지, 또 어디에서 균형이 어긋났는지... 그러다가 네게 이 글을 써야겠다 싶었지.
이렇게 나이가 가득찬 엄마도 때론 겉과 속이 다른, 스스로가 비굴하게 느껴지는 짓을 하곤 해. 젊은 너희들은 더 하겠지(아닐지도... 그렇다면 미안해). 그런데 괜찮아. 이런저런 경험을 모두 해보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라고 여기니까. 하지만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들이 있지 않겠니?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마음 다르고
돈 빌릴 때랑 갚을 때 마음 다르고
내 것 줄 때랑 남의 것 받을 때 마음 다르고...
좀... 비양심적이지?
굳이 이런 비굴한 양심은 안 겪어봐도 되지 않을까?
이런 소소한 것들에서부터 남들처럼 말고 기준을 세우고 따른다면 정말 양심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정말 바람직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양심을 지켜라.', '양심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는데
양심이 뭘까?
그리고 그 '양심'이란 것을 어떻게 해야 '지키는 사람'이 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할께.
신의 부탁.
신이 모든 이를 세세하게 살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세상에 내놓으며 '양심'이란 것을 심어놨어. 이것만은 지켜달라는 부탁에 '양심'이란 이름을 붙여 인간 스스로가 신의 뜻, 거대한 삶의 이치에서 어긋나지 않게 '선(善)'을 지향하도록 자신을 지키길 바랬던거야. 그렇게 인간 누구에게나 똑같이 심장 근처에 심어서 세상에 보냈다구.
거절할 수도 있겠지.
왜?
부탁이니까.
그런데 거절하지 않고 수용한다면 더 유리한 인생을 살 수 있겠지.
왜?
신이 왜 부탁했겠니?
너를 위해서, 나아가 인간을, 인간사를 위해서겠지.
한사람 한사람이 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세상이 더 조화롭고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겠지?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도 이롭게 세상이 돌아가겠지?
그러니까 신의 부탁, 즉 양심에 따르는 게 너와 모두를 위해 이롭겠지?
처음에 인간에게 부여한 양심의 크기는 아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누구에게는 무겁고 크고 찐한 양심을, 누구에게는 가볍고 작고 연한 양심을 주시진 않았을 것 같아.
비슷한 크기와 무게, 탁도의 양심을 주셨겠지.
그런데 왜 누구는 '양심적'으로 살고, 누구는 '비양심적'으로 살까?
유전적, 환경적, 기질적,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과연 어떤 이유들로 인해 점점 양심의 기준과 수준, 밀도가 달라지는 걸까?
어떤 일을 경험하면서 자칫 비굴함을 느끼면서도, 비겁한 행동인 것을 알면서도 행동할 때가 있을거야. 무슨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뭘... 소소한 인간관계나 일에 있어 그냥 그렇게 선택하게 되지. 손을 잡아줘야 할 때 뿌리치기도, 손을 놔야 하는데 애써 아첨하듯 부여잡기도 하겠지. 목숨이 달려 있거나 거대한 협상이 아니니까 깊이 고민하지 않는 거지. 아주 쉬운 예로, 늘 같이 밥먹지만 서둘러 운동화끈을 매는 사람도 있고 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도 있고 늘 팔짱끼고 구경만 하는 사람도 있고 소소한 거짓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어. 어떤 조직이든 여러 군상들이 있어.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그래. 부모가 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부모도 자녀의 몫을 당연하게 자기몫으로 취하는 경우도 있고 부모는 권력으로 자녀를 상대하기도 하고 자녀는 자식의 권력으로 부모를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친구관계에서도 누군가가 공정과 공평에 모순된 잣대를 들이대고는 지배우위에 서 있기도 하지. 요즘같은 SNS 시대에 어떤 기사나 정보가 옳지 않더라도 사실여부를 떠나 우리는 동조하기도 하고 여론에 묻어가기도 해. 침묵이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비겁한 행위가 되는 줄 알면서도 편하니까 대다수가 침묵하지. 삶은 다양한 관계들이 비선형적으로 구성된 거대한 거미줄이야. 정의와 부정이 혼잡하게 섞여서 소신과 타협이 나란히 너의 선택을 기다리지.
자, 우리가 살면서 매순간 겪는 이 숱한 경험들에 있어 개개인이 모두 '양심', 아니 '신탁'을 염두해 두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과연 우리 개인과 조직의 삶, 나아가 전체 생태계가 어떻게 변해갈까? 그리고 그 변화는 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당연히 이롭게, 선하게, 강하게 변화를 일으키며 너의 삶도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겠지.
선한 것은 이롭고 이로운 것은 유리하고
유리하면 강해지니까.
아무도 모르니까, 다들 이렇게 하니까, 내 양심이니까 한번 눈 질끈 감을 수도 있지만 '신탁'이라는 더 위대한 관점에서 자신의 양심을 관리한다면 한번 질끈 감을 눈, 더 똑바로 뜨게 되고 이왕 내일 할 것들, 오늘 해버리도록 자신을 움직이겠지.
성향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야.
양심의 문제도 아니야.
이미 양심은 모두에게 있으니까.
양심이 얼마나 촘촘하게 자기 안을 채우고 있느냐,
즉 양심의 밀도를 따져보면 답이 나오지.
자, 양심은 모두가 태어나면서 부여받았단다. 그러니 '양심없는'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지. 너무 작거나 너무 안써서 고장났거나 너무 허술해서 딴 것으로 채워져 있거나겠지. 즉, 양심의 유무가 아니라 양심의 밀도의 차이에 의해서 삶의 질은, 나아가 모든 생태계의 변화는 이롭게도, 해롭게도 진화되는 것이야.
눈 질끈 감을 때 더 똑바로 뜨면, 양심이 하나 더 추가되어 밀도는 더 촘촘해지지.
미룰 것을 오늘 해버리면서,
해야 할 말을 지금 하면서,
참아야 할 것을 지금 참으면서,
잡았던 손을 지금 뿌리치면서,
찢어야 할 종이를 지금 찢음으로써,
같은 크기로 부여받은 양심에 더 촘촘하고 강력한 밀도를 만들어가는 삶이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나아가 나의 삶을 싸구려취급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삶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밀도는 양의 경쟁이야. 양심을 지켜낸 경험이 10인 것과 100인 것은 숫자로 10배 많아진 것뿐만 아니라 10배 이상으로 촘촘한 밀도를 지닌 것이지. 즉, 양심으로 꽉 차 있어서 다른 공간이 없다는 말이야. 사람마다 비슷한 크기의 양심에 비슷한 나이, 비슷한 경험, 비슷한 행과 불행을 겪는다고 볼 때, 이 과정에서 사용한 양심의 양이 양심에 부여된 공간을 채우게 돼.
양심이 10개 채워진 공간과 100개 채워진 공간은 당연히 그 밀도가 다르지.
비슷한 크기에 10만큼 채워지면 빈 공간에 뭐가 차겠니?
양심이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겠지.
그런데 100이 채워진다면 촘촘해서 다른 것이 들어올 공간이 없고 그렇게 채워진 양심의 강도는 엄청난 위력이 있겠지.
양심은 있고 없고나 적고 크고가 아니라 밀도의 차이이며 밀도는 양으로 채워진다구!
그러니 밀도가 허술한 양심은 어쩌면 네가 기회주의자가 되도록 유혹하는 양심이랄 수 있어.
긴 말이 필요없을 듯하다.
살면서 거창한 계약이나 협상앞에 네가 서게 될 때가 있을거야.
이 때 필요한 2가지가 소신과 소신을 지키기 위한 양심이지.
능력은 다들 비슷비슷해.
계약조건도 대등소이해.
다 거기서 거기야.
그런데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서려고,
조금 더 상대의 것을 내 것으로 가지려고,
조금 더 빠르게 오르려고 위대한 소신을 져버리고 신의 부탁에 때를 묻히는 짓은 당장에 빠르게 높이 갈 것 같지만 추락도 무서운 속도로 찾아올거야. 왜냐면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내 속이 찜찜한데 신의 부탁을 거절한 정신이 오죽하겠니. 계속 널 괴롭히겠지. 결국 그 양심에 미약하든 강하든 느껴지는 통증을 잊기 위해 더 크게 양심을 외면하면서 '양심을 어기는 습관'에 자신을 길들이게 되고 그렇게 인생이 골로 가는거야.
이렇게 사소하게 한번 양심을 어겨서 무서운 추락을 맞이하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소소한 작은 판단에서부터 양심의 양을 계속해서 쌓아야 해. 소소한 일상에서의 양심적인 작은 판단들이 모여 거대하고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네가 되는 거야. 작은 선택이라 할지라도 양심에 기준한 선택은 위대한 선택으로 이어져.
위대한 선택을 하기 위해선 일상의 소소한, 사소한, 다소 보잘 것없는, 하나도 표가 안 나는 그런 사태, 사건, 상황, 현상들에 있어 양심의 밀도를 촘촘하게 쌓아가길 바래. 용기? 용기도 물론 필요하지만 용기 역시 인간본성 자체에 이미 내재된 것이라서 용기는 네가 양심을 지키는 순간 알아서 출동할거야. 그러니 용기낼 필요없어. 용기란 녀석은 이미 계산끝난 게임에는 알아서 출동해. 양심을 지키는 것이 더 위대하다는 계산이 되면, 즉 이치에 따라 행한다면 용기내려 애쓸 필요없어. 저절로 출동하니까.
자, 너의 일상을 한 번 들여다보렴.
친구를 비롯한 인간과의 관계,
학업이나 일같은 대상과의 관계,
네가 사용하는 물건들에 대한 사물과의 관계.
모든 관계에서 너는 양심을 어떤 기준으로 적용하고 있니?
여기선 이렇게, 저기선 저렇게.
너 편한대로 어떤 때엔 신의 부탁을 수용했다 어떤 때엔 외면했다 하면서 신을 농락하고 있지는 않니?
양심을 신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길 바란다.
한결같은 기준으로 매번 선택이 이뤄진다면 다소 일시적으로는 더딘듯, 어리석은듯, 오류에 빠진듯, 나만 바보가 된 듯, 뒤쳐지는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정도(正道, 올바른길)를 가는 길이 그 어떤 길보다 지름길이며 탄탄대로라는 것을 곧 깨우칠 것이야.
키루스가 전장에 나가기 전, 그의 아버지가 충고 한마디를 했지.
"네가 진정으로 현명한 것보다 더 빠른 지름길은 없단다[1]" 라고.
네가 아무리 힘이 약하고 고생이 되더라도, 비록 꾸물거리며 갈짓자 걸음으로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돛대를 달고 노를 저어가는 다른 사람보다도 어느 결에 앞서가게 된다는 것을 살면서 종종 알게 된단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과 나란히 서거나 다른 사람을 앞질러 갈 때 비로소 참다운 스스로의 감정이 생기는 법[2]이야. 그렇게 지켜내야 할 것을 지키는 삶이 오히려 지름길이란다.
엄마도 이 말을 네게 전하고 싶구나.
현명(wisdom)하다는 것은
선(善)의 진리를 따르는 초월적지식의 실천이거든.
소신의 실천, 실천에 필요한 양심을 지키라는 의미이지.
양심의 밀도. 이 개념을 이해했다면 2가지만 간단히 더 첨언하도록 할께.
첫째. 너의 양심은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가 될거야.
양심은 너에게만 적용해야지 타인에게는 강요하지 말아라.
다들 이렇게 할 것이라 기대도 말고 다들 이렇게 해달라는 의지를 보이지도 마라.
그저 너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란다.
누구를 지적하고 판단하고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모두 너자신에게로 향하게 하렴.
네가 양심적으로 판단을 한다면 분명 '판단된 결과'가 비양심적으로 판단된 결과와는 다른 길을 갈 것이기에 그와 연관된 모두도 변하게 되어 있단다. 그러니 모든 의지는 너 자신에게만 사용하렴. 너부터 성장시켜라. 그렇다면 혼란스러운 세상 어떤 곳, 어떤 일, 어떤 환경에서도 너는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가 되는 것이야.
둘째, 양심은 '신독(愼獨)의 실천'이란다.
신독이란 혼자 있더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스스로 삼가할 줄 아는 자세야.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스스로'야. 누구에 의해서, 어떤 룰이나 환경에 지배되서 너의 행위가 바뀐다면 너는 여기선 이렇게, 저기선 저렇게 행하는, 양심의 허술한 밀도가 파놓은 기회주의자가 될 함정 속에 있게 되지. 홀로 있더라도 스스로의 기준에 적합한 사람으로 자기를 관리할 줄 아는 자기조절력. 자기발화력을 지닌 사람이길 바란다.
신독의 실천이 양심을 지키는 기준이 된다면 어떤 자리 내지 위치, 어떤 타협 내지 위협, 어떤 부탁 내지 청탁, 어떤 유혹 내지 현혹에서라도 널 지켜낼 수 있어. 당장의 달콤함은 신이 자신의 부탁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테스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하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엄마의 말이 좀 비장하게 들렸을 지 모르겠다만 사소한 일들이 모인 것이 네 인생의 최종결산[3]이란다.
공든탑이 왜 무너질까?
탑을 쌓는 것에만 공들였기 때문이지. 탑을 쌓을 때 소소하다고 치부된 '보이지 않는 정신'의 틈이 맨홀만큼 커지면서 근사하게 공들여 쌓은 탑도 무너뜨리는 것이야.
전체를 지켜주는 것은
소소한 양심의 축적이고
전체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소소한 타협의 축적이야.
소소한, 결코 티나지 않은 미미한 것부터 지켜내는 위대한 선택들이 모인다면 분명 너는 '위대한 자신'을 발견하고 그 길위에서 인생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을 것이야.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쾌락을 얻게 될 것이고 고귀하고 고결한 삶이 주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보여주고 나눌 수 있는 자가 될 것이야.
결국, 양심이 필요한 순간은 악취가 풍기는 오물속이란 말이다.
타협이, 위협이, 거짓이, 배신이, 유혹이 네게 저울을 들이댈 때 소신과 신의 부탁을 떠올리렴.
눈 한번 질끈 감아도 되는 그 사소한 순간,
괜찮다고 취급되는 작은 행위들에서 너는 보석을 발견하는 쾌거를 이루도록 하렴.
신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는 대가를 치름으로서 보석을 손에 쥔 지름길을 선택하길 바란다.
고대연금술에 등장한, 진정한 보석은 '오물에서 발견하리라!' 이 말의 참의미와 가치를 네 인생에서 증명하길 바란다.
끝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넌 네 부탁 잘 들어주는 사람이 좋니?
매번 믿고 맡겼는데 실망시키는 사람이 좋니?
또 네 부탁을 매번 들어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니?
답이 딱! 나오지?
그래서 양심을 지키는 것은, 양심의 밀도를 높이는 것은, 가치있는 인생의 지름길이며 보증수표란다!!!
[1] 키루스의 교육, 크세노폰, 2016, 한길사
[2]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1999, 민음사
[3] 소로우의 일기, 헨리데이빗소로우, 2003, 도솔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반전]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