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달만에 도시생활을 접고 양평으로 이주한 저의 리얼일상을 이사준비부터 듬성듬성 적어내려 가는 연재브런치북입니다. 헌집과 헌나를 변신시키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우리집을 온통 둘러싸고 있던 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주목나무다. 계절상관없이 푸르고 목질이 단단해서 울타리로도 좋고 굵게 키워놓으면 목재로의 가치도 훌륭하다.
물론, 본 브런치북에서 여러번 거론했다시피 이들의 키가 너무 높이 자라 집전체를 그늘로 만들어버린 탓에 소담한 키에 풍성하게 키워볼 요랑으로 작은 키로 모두 잘라놓은 상태다. 단지, 잘려진 녀석들은 한자리에 켜켜히 쌓여 있거나 베어진 비탈로 넘어져 있어 보기에 다소 흉하다. 나무들의 키를 다 정리하고 매일 베어낸 나무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쪽으로 치워놓긴 했지만 질서없이 어지럽게 쌓여있는 것이 영 눈에 거슬린다.
좋은 것 하나는 이들이 뿜어내는 향만큼은 그 어떤 고급향에도 뒤지지 않을만큼 기품있고 진하다는 것이다. 기품은 결코 한순간에 얻어지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기품있는 향을 만들기 위해 버텨오고, 내버려두고, 극복해온 모든 시간이 세대에 걸쳐 축적된 세월의 최종 결과물이다. 쉽게 얻지 못하는 고귀한 대상을 만났을 때, 나는 그 기품이 지닌 경이로움에 두 손이 절로 모아지는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이는 결코 흔한 경험도, 흔해질 수 있는 경험도 아닌데 난 우리 마당에서 이 기품을 온몸으로 전해받고 있는 것이다.
우 : 처음 이사왔을 때 집의 앞뒤좌우를 온통 키크게 덮고 있던 주목&측백나무들. 키큰 주목, 측백나무들을 1.5M 정도 키로 잘라 집에는 해를 들였다. 잘려진 나무들이 앞마당, 뒷마당, 옆의 비탈까지 켜켜히 쌓여 이것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베어진 나무들은 장작으로 쓰려 한다. 소나무나 주목, 측백나무과는 송진때문에 연료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나 소나무를 제외하고 측백나무와 주목나무는 2~3년 잘 말려서 장작으로 쓸 수 있다해서 매일 1~2그루씩 잔가지, 중간가지, 굵은 기둥으로 구분짓는 일이 내 오후 마당놀이 가운데 하나인데 굵은 기둥은 이제 얼마전 구입한 전기톱으로 자르기로. 이건 남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잔가지와 중간가지 정도는 직접 가위나 톱으로 정리중이다.
매일 조금씩 쌓여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오후 두어시간의 노동이 제값을 한 것같아 뿌듯하다. 나무를 정리하면서 날 흥분시키는 2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잘려진 나무 옆으로 나무의 씨들이 싹을 틔운 아가나무들을 옮겨심는 것이다.
이 녀석들을 옮겨주지 않으면 이들의 신세는 또 잘려져야 하니까. 마당에 적당한 위치로 옮겨심고 그래도 너무 많아 작은 화분에 하나씩 옮겨뒀다. 우리집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한그루씩 선물하여 분재처럼 이쁘고 멋지게 키워보시라 선물할 계획이다.
또 하나 날 흥분시키는 시간은 잘려진 나무의 잎과 잔가지들을 태우는 것이다. 낡고 큰 화로에 두터운 종이 몇장을 가져다가 밑불삼고 주목나무의 잎을 넣으면 나뭇잎자체에 기름이 있는지 순식간에 '탁탁탁' 소리가 나면서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주목나무는 자체독성이 있다. 마치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독을 품고 있나 싶기도 하고... 톱질을 하거나 태우면서 이 독성을 흡입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누군가는 말하던데 이 정도 마셨다고 내가 죽을 거면 이는 주목나무때문이 아닌 게 분명한데도 '분명한 이유찾기'에 길들여진 '똑똑한'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분명하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분명하다' 믿으며 이 자연의 독특하고도 황홀한 향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어리석은 것 같아 나는 내게 '어리석을 권리'를 부여하고 '더 어리석어야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들의 말에는 귀를 닫을 필요를 알게 됐다.
지금은 내가 어린아이마냥 순수해지는 시간이니까.
1일 1~2시간 투자로는 해도해도 끝없는 작업.
그렇게 나의 불장난은 매일매일 이어지다가 27일 눈이 오는 날부터 멈췄고 눈이 녹으면 다시 시작할 나만의 놀이다.
위대한 정오가 지난 오후, 태양이 가장 따뜻한 때에 나의 불장난은 시작된다.
주목나무를 다 태우면 소나무차례다. 먼저 집안으로 향이 퍼지게 모든 창문을 다 열어두고 소나무의 잎들과 솔방울을 태우면 온집안에 솔향이 퍼진다. 그리고 다 태우면 문을 닫는다. 마치 문을 닫으면 고유한 기품의 향이 집안에 갇혀 사라지지 않으리란 어리석은 믿음으로. 향을 담은 집안에서 나마저 기품을 얻을 수 있을거란 더 어리석은 착각으로...
본성자체에서 뿜어내는 소리, 색, 향에는 깊은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깊고 세밀한 본성적 아름다움..
인간이 만든 언어는 평균적인 것, 중간적인 것, 알릴 수 있는 것을 위해 고안(주)되었다는 니체의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모든 것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천재성을 지녔다. 하지만 사실 '이름'에는 그에 걸맞는 개념화를 위해 규정과 제약이 요구된다.
따라서,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알릴 수 없는, 내 속에서 찾아낼 수 없는, 오로지 자체본성으로만 알려지는 신비로운 자연 그 자체를 만났을 때, 아니 영접했을 때 나는 '너무 아름다워 언어조차 부여받지 못한' 궁극의 빈곤이 지닌 매혹에 사로잡힌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1번째 하루를 잘 끝낸 후 2번째 하루의 시작인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고 편한 맘으로 매일 나만의 불장난을 거행(?)한다. 11월 들어 점점 날이 추워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작은 불씨라도 혹시나 바람타고 넘어갈까봐 심장이 쪼글쪼글해지는 심정과 함께 주목과 솔의 향에 취하는, 온 육체가 모두 사치를 누린다.
더운 음식에서 더운 김이 빠지듯 자기 몸의 마지막 생명을 향으로 드러내는
이 마지막 생명의 향을
지금 살아있는, 살아가는, 살아갈 내게로 흡수시킨다.
나 역시 그렇게 나만의 '고유성'을 찾고 싶은 소망 가득 내 속에 품고서...
혹여 이들의 고유성이 내 안으로 흡입되면서
나만의 고유성을 밀어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 또한 품고서...
이렇게 대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생명과 조화를 이루며
'이름없는' 독특한 자기만의 향을 창조해내는 과업이 모든 생명이 지닌 권리가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남과 같아지려는지
나는 모든 명함을 내려놓고 이 곳 자연으로 날 은둔시키길 참으로 잘 했다 여긴다.
나의 은둔은 비겁이나 비굴해서가 아니다.
나만의 언어와 사유를 만들어내어
세상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충족시켜갈 자원을 생성시키기 위한 물러섬이다.
그렇게 축적이 비축이 되는 때,
나의 결정과 시간들이 가치있었음이 증명되겠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시간들이, 시간속에 치러낸 모든 행위와 심정들이 가치없어지는 것이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한 이 곳에서 나는 소리와 향에 자주 취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저어기 나무사이를 쳐다보고 파드득 날갯소리에 오늘 날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고 어디선가 내 코를 간지럽히는 향을 따라 내 발길을 옮기는, 나에게로 온 모든 '무(無)'들이 내 안에서 있던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생성케하는 질료가 되고 있음을 나는 경험하고 있다.
아랫집 청계가 낳은 청계알 / 우리집벽에서 흔히 보이던 청개구리 / 집옆 밤나무위 딱따구리 우리집 옆으로 밤나무가 즐비해서인지 자주 찾아오던 다람쥐 / 마지막까지 잎을 떨구지 않던 마당의 벗나무 집근처에 소나무가 지천이라 아가소나무들도 많고 마당에 흙을 파다 발견한 개미집 어제 눈이 녹기 시작하자 집 바로 위까지 매가 먹이사냥에 나서고 / 얼마전까지 흔하던 도롱뇽
경험은 변화를 동반한다.
변화는 창조와 동격이다.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있어지니
창조란 결국, 자연이 내 모든 호흡기를 열고 감각세포 하나하나마다 통로를 만들어 연신 드나든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찰나의, 미세한 감각이 주는 영감은 '고귀함'을 쫒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은둔자라면 응당 누려도 마땅한 권리가 아닐까..
불장난.
내 모든 감각을 열어주는, 의도치 않았는데 의도가 의지까지 호출한 시간.
불길이 타오르고 초록의 잎들은 검은 재로 변해가지만 이들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온몸이 재가 되어가면 갈수록 더 짙은 향을 내뿜어 자연이 뚫어놓은 나의 감각통로를 통해 나에게로 계승된다.
무엇을 계승받은 것인지 드러내는 것,
계승받은 것을 하나의 생명체인 내가 다시 자체의 고유성으로 농축시키는 것,
농축된 것으로서 나만의 '언어로서 표현이 불가능한' 창조를 일궈내는 것이
이 고귀한 권리를 누릴 자의 '의무'이다.
지금...
나는...
너무나 조용하게...
하지만 위협적으로...
'나'라는 생명체의 고유성을 찾아가고 있다.
석양마중이 끝나고 어둠이 오면 주변에서 주워온 나무들로 집안을 데운다...
불꽃속에서 타는 향이 온방안을 다 채우는 시간...
나의 오늘도... 어떤 시간위에서... 창조로 드러나겠지...
[건율원 ]
[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반전]
화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수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