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Dec 10. 2024

너그러움을 포기하고
냉정해져야 할 때

어떤 면에서 나는 너그럽지 않다. 

여태 나는 몰랐다. 나는 오지랖이 넓고 글로도 이래서 이렇고 저래서 저러니까 구구절절 쓰기 때문에 난 상당히 너그러운 성향인줄 알았다. 그런데 항상 현상에는 대립된 이면이 존재하듯 나는 결코 너그럽지 않은 나를 최근, 급격히 빠르게 발견하고 있다.


이런 순간을 언어화하는 것에 내 지식이 여전히 곤궁하지만 

순간 어떤 느낌에 사로잡혔을 때, 

순간의 내 모든 감각이 머리 속에 그림을 그릴 때,

순간 이면에 감춰진 무언가를 내 시선이 날카롭게 포착했을 때, 

이럴 때 나의 취향은 철저하게 냉정하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만져지는 것에 '예'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아닌데' 라고 하거나(이 때 주변분위기가 어떻든 상관없다.) '아닌데'라는 말조차도 못할 땐 그냥 함구한다. 마음에도 없이 맞장구치거나 얕은 지식으로 수용하거나 이미지나 인정때문에 박수를 보내는 표현은 나의 영역에서 내다버린 지 오래인지라 그냥 함구한다. 함구가 사려깊은 침묵으로 갈지 대상에 대한 외면과 배제로 갈지 차차 알아지게 놔두고 일단 입을 다무는 것이 내 표현이다. 

내가 니체를 접한 것은 벌써 오래전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긴시간 읽었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짧은 시간 강렬하게 읽혀서 나는 급격하게 변했고 '우상의 황혼'은 잡았다 놨다를 반복하며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실천이성비판', '비극의 탄생'은 아직 읽지 못했고 '선악의 저편'은 읽는 중이다. 니체는 한권을 읽으면서도 여러번 쉬었다가 읽게 된다. 한권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을 지나 다음 책을 손에 잡는다. 이해가 안되서, 어려워서, 지겨워서, 흥분되서, 너무 강렬해서 등등이 그 이유다. 니체를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으면서 나는 그가 철학자들을 비롯한 다수를 비판하는 것에 못마땅해하며 니체를 들었다놨다 했던 겁쟁이기도 했다.


니체에게 겁을 낸 것은 내가 너그럽거나 포용적이지 않아서, 혹은 지식이 얕아서일수도 있지만 니체의 냉정함이 내게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냉정함은 니체로 인해, 니체때문에 더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니체를 통해 '나의 너그러움'이, 그러니까 '냉정하지 못한' 표현이 '보고 듣기 좋은 표현'으로 빚어진 위선과 아부, 비굴인 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너그럽지 못하고 냉정한 내 자신을 더 선호한다는 말이다. 이 냉정함이 나를 더 궁지로 몰아넣고 소외시키고 오해의 싹을 틔워 단절의 열매로 쓴맛을 보게도 했지만 나는 나의 냉정함이 오히려 더 떳떳하고 가치있다. 나는 나의 태도에 매겨지는 가치를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 평가해도 괜찮을만한 기준정도는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니체의 야망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책 한권에서 말하는 것을 열문장으로 말하거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책 한권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주)'을 내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나는 더욱 냉정해질 필요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다.


남들이 다 하는 말을 하는 나보다 나만이 해야할 말을 하는 것에는,

남들의 인정이 우선이 아니라 자아로부터의 인정이 우선인 것에는,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획득한 것. 이미 쌓인 것이 아니라 쌓아올린 것을 표출해야 할 때에는,

기존과 평범과 보통을 의심하여 더 높이 고양된 그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나의 정신에게는,

'좋은', '착한'을 너머 '올바른', '선한'을 추구하며 나를 극복해내려는 의지에게는,

지금 '강한'것을 '더 강한 것'으로부터 '약하게 외면해야 할' 인간으로 날 키워내는 시기에는,

내게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내 삶을 온전히 내 깊숙이 품기로 작정한 내 안의 본성에게는,

바다속에서만 사는 물고기가 바다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한정된 앎인지를 알아낸 지금에서는,

너그러움보다 냉정함이 내게 용기이며 실재적인 필요인 것이다.


이제서야 보인다.


지금 내가 집중하는 작업 가운데 하나는 내 지난 글들을 다시 끄집어올려 보완, 첨가, 삭제, 가공하며 재건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내 글의 역사, 이성의 역사를 처음에는 두 눈으로, 그 다음엔 정신으로, 지금은 모든 세포가 전해주는 영적인 감각으로 직관하고 있다. 이는 내가 기존의 창조를 너그럽게 포용하기보다 '냉정하게' 단죄함으로써 나로부터 사죄받고 나를 통해 면죄되는 일련의 과정으로 엮여진다. 전체성으로 내 글이 향하길 바라는 욕구의 발로이기도 하고 전체성을 위한 나만의 훈련과정이기도 하겠다.


모든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그것을 위해 퍼즐처럼 잘 맞춰져 글의 핵심을 향한 각도와 순도가 안정적이어야 하는데 내 지난 글들에선 수식이 과해 오히려 문장의 힘을 약화시켰고 더 감탄스러운 단어를 사용했어야 할 공간에 나의 너그러움이 발동해 그저그런 표현들이 난무했고 뾰족하고 날카로웠어야 할 단어들은 보편적이고 평범한 단어들로 나의 민망함을 애써 감춘 흔적이 많았다.


나는...

보다 더 냉정해지려 한다.

나의 민망, 부족, 한계, 일탈, 실재적인 것, 비실재적인 것들에도 나는 나의 너그러움에 반항을 해야만 할 때다. 무엇을 위해서? 이는 이미 뻔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모두 말하는 것은 내 글이 아니다. 남들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나만 말하는 것이란 인문학에서 드물다. 남들도 말하고 싶었고 나도 그러한데 과거의 내 글이 그랬던 것처럼 민망함과 부족함에 속살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들을 나만의 문체로 써낼 수 있는 용기, 이 용기를 위해 나는 보다 더 나, 그리고 그대들에게 냉정해져야만 하겠다. 


주> 니체, 우상의 황혼, 부북스


2년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엄마의 유산]

브런치에서 깊은 사랑을 받았던 엄마의 유산, 독자들의 응원에 힘입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1. 아래를 클릭하시어 구입하시는 분께는 다양한 혜택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19878


2. 5분 이상모임에 저를 초대해주세요!

책을 읽으신 5분 이상이 모여계신다면 찾아가겠습니다.

[작가에게 제안하기]로 성함과 연락처, 내용, 모임의 성격 등을 알려주세요.


3. '엄마작가', '아빠작가'를 기다립니다!

엄마의 유산은 계승이 목적입니다. 저와 함께 '엄마의 유산2'를 이어가실 엄마작가(초보자라도 상관없습니다.)들, '아빠의 유산'을 써주실 아빠작가님들을 기다립니다.[작가에게 제안하기]로 메일주세요!



[지담연재]

월 5:00a.m. [감정의 반전]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목 5:00a.m. [Encore! '엄마의 유산']

금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토 5:00a.m. [지담과 제노아가 함께 쓰는 '성공']

일 5:00a.m.  [나는 시골로 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