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진짜 가을이다.
꽤 쌀쌀하고 하늘도 아주 높이 올라갔다.
하늘과 땅도 높이가 있나?
하늘이 오른건가?
땅이 꺼진건가?
아니면....
가을만 되면 우리의 정신과 눈이 착시를 일으키는 건가?
음...
여하튼 가을이다!
1주일 전부터 내게 새로운 놀잇감이 하나 생겼다.
매일 중정(가운데 테라스)에서 마당끝까지 나가 집옆으로 난 길을 따라 현관을 지나 텃밭까지 한바퀴 휘 돌면 내 주머니는 뚱뚱해진다.
처음엔 1알,
다음 날엔 5알,
셋째 날엔 10알정도?
지금은 셀 수 없다.
이제 매일 비닐봉지를 가지고 나갈 정도다.
이렇게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에 3번 정도 집을 한바퀴 휘 돈다.
현관으로 나가 마당옆의 길가를 걷는데 뒤에서 툭! 소리가 난다.
아하! 하며 돌아보면 밤알 몇 개가 또로로록~~
벌어진 채 바닥에 떨어진 녀석은 냉큼 내 주머니로 들어가고
송이째 떨어진 녀석은 다람쥐에게 양보하다가
3~4일 전부터는 장화신은 발속 엄지발가락에 팍 힘을 주고 요래요래 벌려봤다.
외동도 있고 쌍둥이도 있고 세쌍둥이도 꽤 많다.
이 곳 시골에서
내 걸음을 멈춰 세우는 것은 밤알 떨어지는 소리.
내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 것은 처음 듣는 새소리
내 가슴을 놀래키는 것은 기어이 열매로 자기이름을 말해준 꽃과 나무.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마당에 또 장대를 올린 두룹.
내게 끊이지 않는 부(富)를 만들어주는 것은 씨앗을 물고 날아가는 새와 호박꽃에 수분하는 벌이다.
아마도 우리집이 골짜기의 끝집이라 사람이 지나다니지도 않는데다 집옆 언덕으론 밤나무 5그루가 이어져 있고 집뒤는 숲이고 또 마당 오른쪽 비탈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 참, 얼마전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걸 봤다. 이 동네는 반딧불이 보호구역이라 칠흙 속에 꺼졌다 켜졌다 하는 희미한 불빛은 아마도 반딧불이가 아닐까 싶다. 눈으로 보니 그렇다. 그러고 보니 몇 주전 돋보기의 도수를 높였지만 내 시력은 더 좋아진 것이 분명하다.
작년 9월 이 곳으로 이사왔을 때는 '칠흙같던 어둠'을 제대로 느낄 정도로 밤엔 맹인이 되어 6시 해가 질 무렵엔 나가지 않거나 나가더라도 후레쉬없이는 한발짝도 걷기 힘들 정도였다. 도시에선 소용없던 후레쉬가 이 곳에선 필수다. 그런데 지금은 칠흙같은 어둠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이제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외부로의 시력은 퇴화되어가지만 내부로의 시력은 진화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활자의 행간에서 의미가 보이고
대화의 여백에서 가치가 보이고
눈빛의 진동에서 진짜가 보이고
호흡의 떨림에서 진심이 보이고...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이고
빛 속에서 질서가 보이고
말과 글속에서 정신이 보이니까...
다람쥐는 날 무서워하지 않는다.
본능적인 움찔은 있지만 피하지는 않는다.
이 녀석은 충분히 이 곳, 자신의 거주지에서 포식하며 평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람이 살지 않았음으로 모든 생명체는 자유롭고 평안하고 신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가장 선한 것이 가장 큰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 녀석은 선한 것밖에 모르기에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다. 선에는 악이 없고 악에는 선이 없으니까. 인간인 나의 등장으로 이 녀석의 선함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저절로 올라왔다.
녀석이 인간을 생전 처음 만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을주민들이 이 길을 따라 산을 올랐을테니. 하지만 그들이 위협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몇번 도망을 쳤겠지만 녀석 눈에는 길고양이보다 더 안전한 생명이 인간이었을테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잠시 멈칫할 뿐 개의치 않고 야물야물 잘도 먹으니까 말이다.
툭툭! 밤나무에서 떨어지는 밤들을 줍는 재미가 쏠쏠한 요즘,
사실 밤을 주워오는 것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었다. '다람쥐에게 양보하세요'라는 도시의 문구에 길들여졌기 때문일테다. 하지만. 여기는 지천이 밤나무고 사람도 안 다니니 다람쥐가 먹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하다(그저 추측일 뿐이다).
너무너무 큰 밤나무에서 내 눈에 띄거나 내 손에 닿지 않는 밤송이들이 저~어기 뒤쪽으로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겠는가. 그래도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것들을 여기저기 숨겨야 하니 딱! 내 재미를 채울만큼만 담아온다.
그런데....아뿔싸...
밤나무 사이에 밤나무만큼 큰, 그리고 잎도 비슷한 2그루의 나무가 있다. 겉으로 보기엔 밤나무같은데 밤송이가 열리지 않아서 별로 관심두지 않던 나무였다.
그런데 세상에...
그저께 보니 도토리가 열린 것이었다.
왜 내가 다람쥐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 빠져 있었을까?
왜 내가 더 안다고, 더 많이 가졌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을까?
왜 내가 근거도 이유도 없이 더 낫다는 오류에 빠져 있었을까?
주식인 도토리도 저렇게 큰 2그루의 나무에 주렁주렁이고
밤나무도 내가 봉지에 담아봤자 쌀 한가마니에서 몇톨가져가는 정도일테니
다람쥐는 재벌이고 나는 서민이다.
그러니,
내가 다람쥐를 위해 나누는 게 아니라 다람쥐가 날 위해 그냥 주는 것이었다.
녀석은 내가 주워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
이 작은 몸집에서 위대한 믿음을 마주한다.
자연이 항상 자신의 배를 채워준다는 믿음.
그냥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배부르면 남기고 겨우내 먹을 것들을 땅속에 파묻고
파묻고 잊어버리면 다른 녀석들이 파묻은 것을 그냥 먹어도 괜찮고.ㅎㅎㅎ
그리고
다시 새봄이 되면 땅위로 솟아 자기만의 세상을 누빌 수 있으리라는 믿음.
이 작은 몸집은 겨우 채운 나의 사고(思考)의 잔을 또 다시 찰랑 흔들어 몇 방울을 비워버린다. 인간은 사고의 잔에서 최초의 방울을 맛본 순간 이미 더럽혀졌다(주)는 에머슨의 말을 또 직감하며 버려야 할 사고들일랑 서둘러 버리고 싶은 충동에 내 정신은 잠깐 떨었다.
나는 여기 시골에서 너~~~~~~무 많은 잉여를 만난다.
내가 우월하다는, 아니 우월해져야 한다는 의식이 도시에서 50년간 무의식으로 쌓였나보다.
도시에선 사람들이 동물을 위해 나눠야 한다지만
여기 그런 자만에 찬 생명은 나밖에 없다.
이 곳을 지배하던 다람쥐를 비롯해 오소리, 고라니, 그리고 벌레, 나비....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나를 어떤 수사도 시험도 없이
받아준 것이다.
나눠준 것이다.
잉여를 베푸는 것이다....
아니다.
'나눈다'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나는 살고 있다.
나누지 않고
베풀지 않고
관심두지 않는다.
그저 자연이 주는, 신의 사랑이 넘치는 이 곳에서 각자 잘 먹고 잘 산다.
무의식적인 지배우위에 빠진 인간을 제외하곤
그 어떤 생명체도 나누지 않는다.
우월도 열등도 없다.
그저 감사하며 자유롭다.
그저 자기본능대로 살면 그만이다.
어떤 임대료도 지불하지 않았는데 나는,
봄에는 지천에 널린 산나물과 취나물과 민들레, 두룹, 머위을 따서 먹었고
초여름엔 오디를,
지금은 밤을 무상으로 얻고 있다.
살면서...
착각인지도 몰랐던 내 속의 '착각'들이 하나둘 여기서 들통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나는 수치스러움을 느꼈고
이어 '수치를 몰랐던 죄'를 면죄받기 위해
깊이 깊이 나를 변화시키며
시골에 온 지 1년만에...
50년의 경험, 수백권의 책으로도 배울 수 없는 소중함을
이제서야 머리숙여 감사히 배우며
이 드러난 비밀스러운 진리에 경의를 표하며
내게 주어진 귀의(歸依)에 평안과 충만을 느낀다.
분명 난 그들보다 긴 시간, 배웠고 경험했고 알아낸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선 그 50년간 배운 모든 것들보다 더 귀하디 귀한 진리를 배운다.
도시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열심'속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책속 활자들이 입체가 되어 실체로 드러난 듯...
우리 인간의 교육이 이렇게 모든 동물, 식물들과 어우러져 이뤄질 수는 없을까?
각진 교실에서 각진 책상에서 각잡힌 선생의 고착된 인식으로
인간이 교육되어질 수 있다는
허튼 희망과 기대는 언제 누구로부터 발상, 발생된 것일까...
나에게 이 곳 시골은...
무한한 진리를 알려주는 배움터다...
이 곳을 너무 사랑하는 나를 느낀다.
이 곳을 너무 사랑하는 나도 사랑한다.
내가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해준 이 곳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한다....
자연은 똑바로 서서 인간에게 신성한 감정의 유무를 탐지해 주는
특이한 온도계로서 봉사한다 (중략)
우리는 '행동하는 자연',
창조자로서의 자연을 존경하는 우리의 마음을 더 이상 게을리하지 말자(주).
수도(修道)나 수험(受驗)도 없이 시험에 합격시켜준 자연에게 난 무엇을 줘야 할까?
줄 것이나 있을까?
이 또한 오만한 발상이다.
무한한 자연에게 유한한 내가 뭐 하나 줄 것이나 있단 말인가..
자기 공간과 자기 품 전부를 허락해준
하늘과 땅과 나무와 벌레와 동물과 모든 것에...
그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밖에.
그들의 삶에 보탬이 되려는 자만한 발상도 버리고...
그저 방해되지 않게 고요히...
그저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밖에...
그저 나라는 한 생명체의 고귀함과 가치가
훼손, 상실, 소멸되지 않게 나를 잘 키워나가고 싶은 마음만
더 간절해진다...
동물과 식물에 대한 경의,
생명에 대한 경의를
'나'라는 생명도 느끼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에게 그런 권리와 자격이 있음을 왜 여태 알지 못했을까....
'나'도 생명이고 동물인데...
'나'도 '나'에게 경의를 느끼게 해줄 의무와 의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도 '나'에게서 경의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주> 자기신뢰철학, 랄프왈도에머슨, 동서문화사
# 지담의 책과 글, 사유의 놀이터에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연재]
월 5:00a.m. ['대가'에게 배우는 글쓰기]
화 5:00a.m. [엄마의 유산]
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목 5:00a.m. ['대가'에게 배우는 글쓰기]
금 5:00a.m. [나는 시골에 삽니다.]
토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일 5:00a.m.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