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시골에서 맞은 첫 겨울,
영하 20도 추위와 쏟아지는 눈이 너무 무서웠던 기억에
얼마 전. 서리가 내린 이후 나는 마음 한켠에 조바심이 인다.
장작도 쟁여두고 보일러 기름도 채워두고 눈이 수북하게 쌓이면 나갈 수가 없으니 이에 대비해 냉장고도 채워둬야 한다. 도시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월동준비. 작년 겨울, 대책없이 눈과 추위에 당해본터라 올해는 나름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지만, 두툼한 양말 몇켤레, 핫팩 등등 뭘 해야 할 지 여전히 모른다. 두려움이 기억에서 해방되어야 나의 긴장도 해방될텐데...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는 생활이라 독서토론이 끝난 아침 7시면,
이것도 운동이랍시고 그냥 마을 전체를 크게 한바퀴 돈다.
빠른 걸음으로 신나게!
찬바람이 내 뺨을 냉기로 후려치지만 개의치 않고 돈다.
진짜 빠르게. ㅎㅎㅎ
겨울바람은 날 배려하지 않으니 내가 추위에 강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전부터 집집의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침을 지으시나...
간밤은 따뜻하셨겠지...
어르신께서 여전하시구나 싶어 내 마음도 안정된다.
연기가 흘러 나오는 것은
그들의 사적 생활이 외부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
연기는 누군가의 삶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연기는 형체없는 실체이고 소리없는 말 같다.
연기는 그들의 삶을 드러내며 내가 세상속에, 이들 속에 존재함을 알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든 드러난다.
그저 장작을 태웠을 뿐인데 삶이 드러난다.
어르신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노인의 평화로운 숨결처럼
때론 거칠고 위태로운 한숨처럼
하늘에 닿기 전 몇번을 맴돌다 대기속으로 흩어지지만,
타는 장작이 재로 쌓이듯
어르신들의 하루는 그들의 인생에 고이 쌓였을 것이다.
인간 문명의 시작을 알렸던 '불'처럼
개인의 하루도, 불과 더불어 역사로 이어지며 자기만의 문명을 이어간다.
문명의 원형이 '불'로부터였듯
나의 원형도 이렇게 태우고 사라지는
시간의 중첩,
닫고 열고, 태우고 사라지고, 모으고 흩어지는 반복의 지속이다.
집집마다 겨울준비로 가득 쌓인 나무는
그들의 근면을, 정갈함을, 오랜 세월 지켜온 지혜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나무 냄새...
찬바람도 어쩔 수 없는 나무냄새...를 내게로 보낸다.
물론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가며 보는 것'과
'함께 살며 보는 것'은 분명 아주 다르다.
스치듯 보는 것이 '현상이 감정'으로 흐른다면
살면서 보는 것은 '의미가 현상'으로 흘러간다.
스치듯 보는 것이 '풍경'이라면
살면서 보는 것은 '지층'으로 내 마음과 정신에 쌓인다.
살아보니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다.
시간에 함께 어우러져야만 느껴지는 감각,
관계가 함께 연결되어야만 알게되는 의미,
반복이 계속 지속되어야만 드러나는 본질...
삶은...
'앎'을 '감정'으로 느끼는 힘보다
'앎'을 '실체'로서 살아내는 힘이니까...
그저 시골의 정겨움이었던 쌓인 나무와 굴뚝 연기는
지금은 내가 이 세계, 이 마을과 어떻게 관계맺어졌는지를 깊이 알게 한다.
매일 아침 빠르게 운동하며 마을 한바퀴를 도는 시간은
겉으론 신체를 움직이는 운동같지만
실제로는 정신에 어르신들의 삶을 들이는, 더 활기찬 운동이다.
세상에 나같이 나약한 인간이 또 있을까 싶던 시간들도 길었다.
연기는 늘 방향을 잃는 듯 바람에 흔들리지만
이내 또렷한 선을 그으며 위로 솟아 하늘을 찾아간다.
나도 그렇다.
하루는, 아니, 어떤 시간들은 방향을 잃고 흔들렸지만,
이내 또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정해진 방향으로 나는 나를 걷게 한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삶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르신들이 그리 오래... 이 곳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존재에 '생'을 지켜냈듯
나 또한 그러해야 하리라.
연기는,
나무의 생이 귀결에 닿은 신호지만
사람의 생은 여전히 현존한다는 존재의 신호다.
하루를 세월 속에 켜켜히 쌓아, 아니 쌓아내고야 말았다는
삶의 소박한, 그러면서도 강인한 흔적이다.
하나의 생이 끝나는 지점에 교차되는 온기의 역설.
그래선지,
나무의 삶과 사람의 삶은 닮았다.
근원을 내리고 계절의 아픔을 이겨내고 기어이 자기 열매를 맺고
띡 자기만큼의 양분을 땅에 남기고 떠나는 낙엽,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선가 누군가의 온기로 쓰이는 나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은
형태를 달리할 뿐, 어떤 방식으로든 다음 생을 살게 한다.
모든 것은 흐른다.
연기처럼...
나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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