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9월 20일에 난생 처음 시골살이를 시작했으니 1년하고 3개월이 지났다.
그 정도밖에 안 산 것도 같고
이 정도나 한참 산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여기선 매일매일이 관찰이고 배움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땐 '왜 이렇게 까마귀가 많지?' 했다.
논에, 전깃줄 위에 까마귀는 항상 떼로 몰려 다녔다.
녀석들은 빈틈없이 까맣다.
정말 까만 마귀같았다.
까만색을 좋아하는데 까마귀는 좋아하지 않았다.
관념이었다.
까마귀는 나쁜 징조를 몰고 온다는.
까마귀있는 곳엔 시체가 있다는.
그래서, 불길하다는.
시골에 온 이후로 내게 가장 큰 변화라면
'신기하다. 신비롭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이? 아니 거의 매일 한다.
'커피가 다 떨어졌네'하면 커피가 선물로 배달되고 '과일을 사야지.'하면 과일이 배송되고 심지어 '쌀주문을 해야겠네'하면 쌀이 배달되고 '김치담아야 하는데'했더니 지인이 김치를 보내준다. 외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이럴 때마다 난 신기하다, 신비롭다. 엄마는 비현실에 사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일이 몇달간 이어지고
이게 무슨 조화인지 '신기를 너머 신비롭다'고 지인에게 얘기했더니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님이 그리 하나에 몰두하시니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하느님이 작가님을 돌보시나봐요.'하셨다. 그게 말이 되나? 했지만 그녀를 통해 나는 엘리아의 기적(주1)을 알게 되며 까마귀는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을 필연으로 비약했다고 놀림받을 지도 모른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어디 성경에 빚대냐고 질타받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결코 성경말씀이 현실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데에 반박 또한 불가능하니
그저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자만에 빠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이치대로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하며
내 할 도리 제대로 옳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능적으로는 영장류와 견줄 정도로 조류 중 최상위,
동아시아권에서는 태양 속 삼족오(三足烏), 왕권을 상징,
북미 원주민에게는 신화 속 창조영웅,
우리 한국에서도 전령으로 세상의 순환을 알리는 존재,
까마귀.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지금까지 들어왔던 풍월대로 녀석을 '흉조'라 여겼었다.
며칠 전 주방쪽으로 보이는 나무 위에서 까마귀떼가 까악까악하며 계속 시끄럽게 하늘을 빙빙 돌며 떼로 울어댔다. '싸움이 났나?' 싶었는데 잠시 후 매 한마리가 풀숲사이에서 뭔가를 낚아채다가 까마귀들의 공격에 먹잇감을 떨어뜨리고는 줄행랑을 쳤다. 까마귀는 곧장 더 크게 까악까악대며 떼로 날아가 매를 멀리~ 쫒아버리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너무 신기했다. 우리집은 골짜기 끝이라 가끔 독수리가 날아다니는 것도 보일 정도다.
여하튼 지인에게 그 말을 들은 후부터 나는 녀석들이 다르게 보인다.
사람은 자기 인식대로 사물을 본다.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조차 실체가 아님을
이제 알겠다.
보이는 것이, 아는 것이 얼마나 우메한지 난 시골에 와서 와장창 깨지고 있다. 그리고 깨지는 것이 아프기는 커녕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럽다. 바닥을 만나는 순간은 제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지난 내 행동들의 수치를 절망적으로 깨닫게 하지만 그보다 더한 바닥은 언제나 또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매일 더 깨진다는 의미를 전제하니
매일 나는 수치스런 나와 당면하고
매일 변모하는 나를 새로 들인다.
그렇지,
그렇게 깊게 깊게 아프게 아프게 깨져야
진짜 바닥이 드러날 것이고
진짜 바닥에 내리꽂힐 때
드디어 바닥에서 샘솟는 샘물을 만날 것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뿐인데 내 얕은 지식과 고착된 인식으로 현상을 해석하려는 무모함은 이제 거의 벗겨졌다. 벗으려 애쓴 적이 없으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깨졌나보다. 까마귀를 흉조로만 여겼던 '갇힌 지도 몰랐던 인식'이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졌듯, 내 안에 여전한, 깨서 걷어치워야 할 상념과 관념과 집념들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벗고 깨고 버리며 나를 바닥으로 내리꽂는 중이다.
하지만,
내리꽂히는 추락과 몰락이야말로
서서히 제대로된 '인간정신'을 갖춘
'나'라는 원석을 찾게 하고
본질의 샘물을 들이부어
드높은 산봉우리까지 날 올려줄
근원이라는 것도 안다.
가장 깊은 곳에 닿아야
가장 맑은 물을 만나
원석의 나와 손을 잡고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다.
이 진리대로 나는 깨질 준비를 마친 상태다.
매일 깨지고 매일 바닥을 본다.
내 안에 고착된 정신의 무질서와 감정의 폐허를 만날 때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안녕을 고하고
새로운 나를 안녕하며 들인다.
시골에게, 자연에게,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원주민들에게
무식과 자만을 오가던 내가 무참하게 깨져 버렸으니
이들이야말로 내게 위대한 스승이라 감히 말하겠다.
여기 와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신 할머니들과 교류하며 '삶의 철학'을 배우고
가지, 고추, 호박 등의 작물을 키우며 '삶의 원리'를 배우고
어린 단풍나무와 장작이 되기 위해 잘려진 엄마 단풍나무를 보며 '삶의 순환'을 배우고
애벌레와 나비를 보며 '삶의 초월'을 배우고
흙을 팔 때마다 기겁하며 내 발목을 물어뜯는 개미에게 '삶의 태도'를 배우고
수십미터 낙엽송 끝에 집을 지은 말벌에게 '삶의 고유성'을 배우고
매일 나를 황홀경에 빠뜨리는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의 의미'를 배운다.
시골에서 나의 하루는 부호로 이어진다.
새벽 4시, 물음표(?)로 하루가 시작된다.
새로운 날, 어떤 새로운 내가 될지 하루의 귀결이 궁금하니까.
매순간 마침표(.)를 찍는다.
해야할 것들을 이도저도 아니게 말고, 매순간 제대로 마침표를 찍으면 하루를 보낸다.
자기 전 느낌표(!)로 마무리한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인 것이다.
사이사이 별(*)표도 몇 개 받은 하루는 더 신나고 신기하고 신비로운 날이 된다.
시골에 와 처음엔 까마귀가 너무 많아 싫었다.
흉조라서 싫었고 자꾸 울어대니 더 싫었다.
그러나 수개월전부터 까마귀가 너무 많지만 귀하다.
신의 전령이라 귀하고 내게 큰소리로 뭔가를 자꾸 알려주니 고맙다.
여전히 내게는 깨져야 할 수많은 인식과 편견들이 많지만
난 무엇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니
자연이 얼른 내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까마귀는 신의 전령이 맞는 것 같다.
검은 깃 속에 감춰둔 음성으로
녀석은 늘 내게 소리친다.
'너는 네가 뭘 아는지도,
네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바보다'
나는 매일 낮아지고
낮아지는 만큼 깊어지고 싶다.
추락하여 맞닥뜨린 바닥에서
나는 내 안의 원석이 뿜어내는 샘물을 퍼올리고 싶다.
나는 그렇게 매일 깨지고 씻기고 닦이고 싶다...
자기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 바보니까 피해라.
자기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단순하니까 가르쳐 주어라.
알면서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고 있으니 깨우라.
알면서 안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 현명한 사람이니 따르라(주3).
주1> 열왕기상 17장 6절. 이 구절에 따르면, 선지자 엘리야가 가뭄 중에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까마귀에게 명령하여 아침저녁으로 빵과 고기를 물어다주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엘리야를 돌보신다는 상징적 기적으로 여겨진다.
주2> 그림 출처 : Elijah fed by Ravens (NL 17th c.), Dutch School, public domain. Source: Wikimedia Commons.
주3> 아라비아속담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8437164
[지담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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