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놀 줄 안다. 노래방도 가봤고 쇼핑센터도, 화려한 불꽃도, 보세옷집들이 즐비한 길가도, 남들 다 가봤다는 어떤 쉐프의 맛집들도 다 즐길 줄 안다. 이러한 삶의 소소한 쾌락에 나의 지난 시간은 길들여졌고 나는 '열심히 일한 자 즐기라'는 구호대로 즐기기 위해 일하고 만나기 위해 열을 올리며 살아온 시간들이 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러한 놀이와 즐김의 싫증에 가속도가 붙었고
그 속도만큼 피곤함과 무용함은 비례하며
다른 놀이를 찾아 헤맨 시간도 덩달아 길었다.
'시간'이라기보다 '세월'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놀았고, 다른 놀이를 찾았던 긴 세월'을 보낸 어느 날,
난 나에 대해 알아버렸다.
난 혼자를 좋아하고 혼자 즐기기를 더 원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도 없는 길가를 뒷짐지고 어슬렁거리며 사색을 즐기고 외부로부터 진입하려는 생각들보다 내 안에서 분출하려는 욕망들을 머리 속에서 하나씩 정리해내는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들을 더 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혼자'를 사모하는 사람이었다.
워낙에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소리를 듣는 나였지만
진정한 '혼자'일 때 '영혼'이 '자유로이' 논다는 진리를
여기 시골에 와서 너무나 깊게, 삶 속에서 깨닫고 있다.
자발적으로 '혼자'를 택한 이후
'고독'은 나의 '놀이'가 되었고
'놀이'는 나의 '일상'이 되었고
'일상'은 나를 '장난감'삼아
내 '삶이 놀이'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바위나 점토를 발견하기 위해 모래나 진흙을 거부하기로 결정했을'때, 그는
'아주 멀리 떨어진 사막에서 살 때 경험하듯이 고독하고 한적하게'
살 수 있는 장소로 물러서는 과정에서
오히려 익숙한 영역을 재발견했다(주1).
나도 나를 재발견하는 놀이에 푹 빠져 있다!
내 삶의 앞에서 내 삶을 더 진정으로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나의 가슴에서 정신을 뚫고 분출되자
모든 선택이 장난처럼 재밌었고
뭔가 새로운 삶이 내게로 온 듯하여
하루하루가 크리스마스처럼 들떴었다.
93년부터 운전을 해오던 내가 과감하게 차를 버리고
냉장고는 1개면 족하다고, 옷도 필요한 몇벌이면 된다고,
잘 치지도 않으면서 20년간 자리를 차지했던 피아노부터,
나의 20대를 대변할 CD, 영화비디오테잎들까지
아무튼 그냥 다 버리고
책과 책상, 냉장고, 세탁기, 간단한 테이블 몇개만을 챙긴 채
여기 시골에 쳐박혔다.
여기서 난 가볍게 책과 글, 코칭만으로 논다.
무한한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어울리게끔
무한한 나를 끄집어내는 놀이, 나의 재발견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을 바라는 것은, 말 그대로 탐욕이라 여길 정도로 하루하루가 충만하다.
사람은 물론 사회적 동물이다. 나도 물론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그 속에서도 난 나의 영혼과 교류하며 내면의 자유를 혼자서 즐긴다. 이제 내게 '기어이 해내는' 일 따위는 없다.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해내고서 무한 자유를 허락받은 삶으로 전이된 지금, 그토록 원하던, 삶이 자유로운, 그래서 충만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끄는 그런 더없이 소중하고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가족들도, 지인들도 여전히 내게 묻는다.
'왜 혼자가 좋냐? 외롭지 않냐? 혼자 좋아하다가 사회에서 뒤쳐진다'고.
그럼 그러라지 뭐.
차를 팔아버린 나의 교통수단은 아들이 중학교때 타던 자전거.
나는 읍내에 나갈 때 늘 자전거를 이용한다.
시야에 건물하나 포착되지 않는,
하늘과 강이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달릴 때
어휘는 힘을 잃는다.
온 세포로 느끼는 감각은 제 아무리 고수의 필력이라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매가 허공을 가르고, 계절따라 뻐꾸기에서 독수리까지
고도를 지배하는 새들의 비행은
내 심장을 거친 자유로 뛰게 한다.
집앞 강가부터 강폭이 넓어지는 강줄기에는 늘 백로나 외가리가 혼자 고고하게 서 있다. 때론 물 속에서 목욕을 즐기기도 하고 떼지어 물을 밀어내며 수면으로 내려앉는 오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가는 다리로 위태롭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난 그들에게서 떼지어 노니는 오리를 부러워하기는 커녕 순간을 오롯이 자기로써 존재하는 당당함을 느낀다.
새들뿐만이 아니다.
골짜기 끝에 위치한 우리집 근처에는 고라니도 홀로, 뱀도, 나비도, 개구리도
모두 홀로 삶을 살아낸다.
우리는 너무 시장통같은 많은 소리를 듣느라 내 소리를 듣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간섭과 참견에 길들여져 내 의견을 말하는 법을 잃어가는지도 모르고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다리라 여기며 많은 이들의 외양에 신경쓰느라
정작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창조의 다리는 한번도 건너지 못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애피카르모스는 보고 듣는 것은 오성(悟性)의 일이고,
모든 것을 이용하고 모든 것을 처리하고 행동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도 오성의 일이며, 그 외 다른 모든 일들은 맹목적이고 몽매하고 혼백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성에게 제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비굴하고 겁많게 만듭니다(주2)
정작 나의 세상을 운행하는데에 필요한
나만의 운행지도와 운행방법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나비는 똑같이 생긴 번데기에서 다양한 색조의 자신을 빚어내고
꿀벌은 여기저기 꿀을 모으지만 자기만의 꿀을 제조하고 조향하는데 말이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물길을 따라 흐르지만
그 속에서 나만의 이상을 바라며
나의 하루하루를 꿀처럼, 색처럼 빚어 쌓아내는 시간이며,
사유를 숙성시키고
정신을 발효시키며
영혼을 정제하는 미세한 발아의 시간이다.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토과 같은 극소수의 현자들이 고통이나 환희를 모르는 '사유의 삶'은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신선한 것이며, 사유자체, 즉 정신이 '하늘과 땅의 왕'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도, '다수의 불결성'으로부터 벗어나 '극소수'의 무리에 합류하거나 유일자의 고독에 몰입하는 것은 철학자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주1).
물론, 나는 철학자를 꿈꾸거나 영예를 얻고자 하는 욕망은 없다.
그저,
지금 이렇게 보내는 모든 시간들이 쌓이고 농축된다면, 훗날
시간의 뚜껑을 열고 내 지난 사유의 길을 되짚을 그 때,
분명 난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하다.
자연에서, 자연답게,
그렇게 나를 키우고 나를 성취시켜 왔다.
나는 나를 잘 키워내어 잘 쓰였다...
나는 여기서 나를 찾고 드러내고 표현하며
하늘에, 산에, 숲에, 나무에
새, 뱀, 나비, 벌, 모든 생명들에게 재발견한 나를 알려주는 게
이렇게 재미난 놀이인지
나이 50이 훌쩍 넘어 새로운 장난감으로 '나'를 택하고서
매일 아이처럼 논다.
주1> 한나아렌트, 정신의 삶, 푸른숲
주2>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동서문화사
https://guhnyulwon.wixsite.com/my-site-2
[지담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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