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시골은 가을내내 수확이 한창이었고 된서리가 내리자마자 서둘러 김장을 끝내느라 마을 전체가 분주했다. 집집끼리 날짜를 맞춰 3~5인이 한집씩 돌아가며 김장을 도왔다. 이분저분이 친하시구나..., 어? 왜 이 분은 안 보이시지? 왜 이 분은 혼자 하시지? 여하튼, 아침마다 경보로 마을을 한바퀴 운동삼아 걷는 낯선 (지금은 덜 낯선) 이방인인 내 눈에도 누가 누구랑 어울리시는지 한눈에 보였다.
이 시골의 작은 마을, 어느 집 숟가락이 몇개인지까지도 알만큼 몇 분 안되는 마을주민들 사이에도 서로 친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계셨다. 더 리얼하게 얘기하자면 누가 리더인지, 누가 평소 베풀고 살았는지, 누가 인심을 잃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인간사에 천가지만가지 이유가 있으니 내가 단지 본 현상만으로 말하기는 많이 건방지다 할 수 있지만 느낌상으로 그렇겠구나 하는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은 그런가보다.
아무리 일이 고되도 편한 사이엔 일이 놀이가 되고
아무리 일이 편해도 불편한 사이엔 놀이도 일이 되는...
사람은 또 그런가보다.
몇 사람 안되는데도 맘 편히 도움 청할 사람이 많기도 하고
여럿이 모인 곳에서도 도움 청할 사람 하나 없기도 하고...
사람은 어디서나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많이 도와도 도움청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도 도움주지 않았으면서 도움은 잘도 청하는 사람도 있고...
여하튼
가을의 시작부터 낙엽이 다 떨어져가는 지금까지 우리 마을은 아주머니 또는 할머니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재밌는 것은 어떤 분들이 모여 계신지 대문과 마당을 드나드는 개들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용문이, 까미, 깜이, 콩이, 백수, 나리, 밤비공주, 팔팔이.
동네 개들이 새끼를 낳으면 친한 집끼리 새끼들을 '분양'이라 하지만 그냥 나눠 키운다. 깜이와 콩이의 엄마는 까미가 확실한데 나리와 용문이, 팔팔이는 누가 어미고 누가 새끼인지 구분이 안간다. 아무튼 어미와 새끼가 어떤 집에 있느냐만 봐도 어르신들의 친분관계를 알 수 있다.
김장하는 날은 친한 분들이 모이는 것과 동시에
개들에게는 모녀, 모자 상봉이 이뤄지니 개들도 덩달아 신나는 날이다.
이제 막 순산한 '밤비공주'의 아가 4마리도 곧 동네 여기저기를 마구 돌아다니며 모녀, 모자상봉에 애타겠지.
젖을 떼자마자 마을 주민들이 데려다가 한마리씩 키우니까.
여하튼 김장날에는 각자 집에서 키우는 개들도 덩달아 함께 모여 있으니 주인따라 개들도 친해지는 것 같다. 남의 대문이라도 꺼리낌없이 들어서 서슴없이 먹고 싸는 걸 보면.
김장에서 개로 이상하게 이야기가 흘러간 듯한데
다시 본래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사실 처음엔 이렇게 모여서 품앗이하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다가 며느리나 딸들이 와서 가족끼리 김장하는 모습이 거의 없는 듯해서 조금 안타깝다가, 그러다가도 주민들이 모여서 고된 수확철 노동도 함께 하고 김장도 담그고 또 콩도 함께 터시는 모습이 또 정겨웠다가... 하긴 우리 집은 아예 김장도 안하니 '나나 잘하자' 했다가...또 지나다가 할머니 혼자 김장하시는 모습 보면 괜히 발길 멈추고 거들기도 하고...
이 마을 주민들은 나를,
농사지을 땅이 없고
그러니 농사일도 없고
또 그러니 수확도 없고
또또 그러니 먹을 것도 없는,
결국, 그러니
가장 가난뱅이에, 한량이에 '도움받아야 할' 1인이라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마음은 착하고 여려서 지나가다 할머니가 뭐라도 하고 계시면 조금이라도 일손을 거들어서인지 내가 지날 때마다 배추 두어포기, 무우 두어개, 무청 가득, 우거지거리. 등등을 '가서 치대서 먹어!', '가서 국끓여 먹어!' 하면서 연신 내 손에 들려 주신다. 자주 얻어먹는 나도 연신 할머니들 간식거리를 이것저것 가져다 드리는데 이 주책과 오지랖과 정성과 관심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도시에선 결코 느껴보지 못한 정(情)이다.
암튼 배추를 키운 적도, 김장할 생각도 없는 내가.
김치가 똑 떨어져 마침 주문하려고 할 때
어쩌다 김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그것도 혼자.
혼자하기엔 좀 버겁고 같이 하기엔 양이 적은, 애매모호한 상황에 맞딱드리면 그냥 얼른 해치워버리는 내 성격대로 굵은 소금에 소쿠리까지 얻어다가 얼른 절이고 2일 뒤 조물락조물락 대충 치대어 김장 끝! 혼자 만세외치며 좋아라 폴짝폴짝 뛰었다!
얼마전 잔뜩 얻은 고구마줄기로는
황태채 넣은 고구마줄기 김치를 담고 나머지는 소분해서 냉동실행.
무우로는 석박지를,
배추는 김장김치와 겉절이를.
총각김치는 담으신 걸 가져다 주셔서
김치가 딱! 떨어졌는데
오호...
집에 김치가 풍년이다!
너무 든든하고 풍성하다!!
안해서 그렇지 하니까 든든하다.
무슨 일이든 그렇다.
하기 싫어 미루거나 안하려 맘먹어도
예상치 않은 일들은 날 움직이게 하고
움직이면 움직인만큼 뭔가가 생겨나고
생겨나니 풍성해지고
풍성해지니 감사도 커지고
감사가 커지니 나누게 되고
나누니 하기 싫어 미루기보다 해버리기 잘했다 싶고.
그래서 감사하게도 난 뭘 미루지 않는 경향을 가진 것도 같고.
어쩌다 김장을 하게 된 우연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김장 끝나자마자!
그러니까,
오후 5시경 택배가 왔다!
내게 언지도 없이 지인이 '굴'을 보낸 것이다!!!!
아~~~~~~~
이건 '우연'이 아니라 '신비'다!
작은 우연을 신비로 호들갑떠는 나의 이성은
미세한 미각을 지닌 영혼의 떨림때문이지 않을까...
얼마 전 지인이 내게 해주신 말씀.
하나에 집중하는 사람에겐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고...
이 은밀한 선물은
치밀한 계산으로,
의도된 유혹으로,
섬세한 조화로 일상의 문을 연다.
이것이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그저
매일매일이 감사할 뿐이다....
난 시골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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