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교육에 대한 많은 논의와 저서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이 간단하고도 위대한 개념을 완전히 파악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주1).'
괴테의 소설속 주인공인 빌헬름의 고백에 나 역시 동감하고 반성한다.
교육에 몸담고 있는 교육자로서,
이 세상을 먼저 살아가는 기성세대로서,
닮아도 좋을 인생으로 보여져야 하는 어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야 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두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부모로서,
나는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할 한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교육의 주체'여야만 한다.
교육의 본성에 대한
거대한 명제를 실천하고자 하는 책임의 하나로
이 글을 시작하는 지금,
나는 살짝 비장해진다.
긴 시간의 숙고와 강도높은 지적통증이 과연 옳은 사고로 재창조되었는지에 대한 시비(是非)와 수준을 논하기 전에, 지금 드러내는 나의 '교육'에 대한 견해 내지 주장에 더 나은 이들의 지성이 보태져 교육의 본질에 우리가 더욱 근접할 수 있길 바라는 맘 간절하다.
교육에 대한 소고의 결론부터 내리자면,
교육은 삶으로 직결되어야만 한다.
이런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보고 만지고 듣고 느낀다. 사물과의 거리, 즉, 물리적인 관계는 우리의 사고 안에서 비물리적 체계인 감정과 '느닷없이' 연결된다. 감각은 감정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다. '느닷없이' 느낀 감각은 '의아함'으로, '의아함'은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이념이나 사상과 연결되고야 만다. 다시 말해, '실존적인 느.낌.', 즉 오감으로 직접 느끼는 감각과 '초월적인 느.낌', 즉 오감 너머 또 다른 공간에서 유동성을 지닌 감각은 그 대상의 형상과 현상을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나에게 각인된다.
교육이란 형이하학의 세계인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나의 '실재'와 '실재가 아닌 것'의 연결을 형이상학적인 초월로 이끌어 세상에 제대로 쓰이게 돕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실재가 형이상학적인 초월로 이어지는 연결! 이 연결에 '교육(敎育)'이 있다. '육(育, 기르다)'을 통해 이뤄야 하는 것은 실존과 이상의 연결로 현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초월한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은 형이하학적 범주의 앎을 형이상학적 삶으로 연결짓는 다리(bridge)로서의 기능에 그 역할이 있다고 하겠다.
지혜의 철학자 '발타자르그라시안(주2)'은 '진정한 교육은 두뇌를 연마'하는 것이라 했고
내가 경외하는 '올더스헉슬리(주3)' 역시 '교육을 통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 중 하나는 좋든 싫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제때 해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 '몽테뉴(주4)'는 '교육의 목적이 글을 배우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람을 만드는 것'에 있다 했으니
우리는
화학을 아는 것과 조리하는 것
지리를 아는 것과 세계을 아는 것
생물을 아는 것과 자연을 느끼는 것
체육을 아는 것과 스포츠를 하는 것
수학과 경제학을 아는 것과 거래하는 것
국어를 아는 것과 쓰고 읽고 표현하는 것
음악미술을 아는 것과 감상하고 느끼는 것
철학을 아는 것과 직접 그 지점에서 살아보는 것을 연동시켜
'앎'이 '삶'으로 연결된, 지독하게 건너기 어려운 교육의 다리 위에서 흔들흔들하더라도
'학습'해야만 한다.
'학습(學習)'이란 '익혀서(習)' '배우는(學)'것이다.
'습(習)'은 깃(우, 羽)이 하얗게(백, 白)되도록 무수한 날개짓을 반복하며 이소하는 새와 같아야 한다는 의미다. 본능에 자신을 맡긴 채 자신의 신체가 지닌 모든 힘으로 가야할 곳으로 향하는 아가새처럼 현실의 가열찬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찾아 본능적으로 떠나는 것이 '학습'이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간이 육성될 때 우리는 이렇게 소리치며 감탄한다.
진정한 교육은
나의 앎을 삶으로,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이렇게 학습된 교육은 삶의 곳곳에서 출몰하는 블랙스완(주5)에서 나를 구하는 초월적 힘을 지닌다.
이에 대한 '에머슨(주6)'의 거론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교육이 필요한 때가 있다.
질투는 어리석음이고 모방은 멸망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자신의 몫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드넓은 우주는 좋은 것들로 가득하지만 자기몫으로 주어진 땅에서 그저 밭을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옥수수 낟알 하나도 절대 얻을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를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중략)
우리 안에 존재하는 힘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또한 자기 자신도 스스로 도전해보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중략)
신은 겁쟁이를 통해서는 결코 그 어떤 일도 시도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진정한 교육이란 학교안밖에서 이뤄지는 합의 총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이렇게 교육되어진 인간의 숭고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극한 존중을 바쳐야 할 타당도 확보되었다. 즉, 교육은 인간을 그 자체목적성에 가장 적합한 아름다운 경지로 이어지게 하는 다리인 것이다.
불완전한 영혼이 교육을 받거나 준비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 열등한 성질이 갖는 모순이 오래 지속되는 위험에 처하게(주7)된다.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 가여운 영혼이 배우지 않고 어찌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배움없이 사는 오만한 인간이 되서는 안되기에,
교육되어지지 않아 삶을 모순된 위험에 처박히게 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배움에 순종해야만 하겠다.
내가, 그리고 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관련된 모두를 위해 나부터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삶의 중심축을 세우기 위함이며 기준을 중심으로 흐름대로 삶을 따르는 것이 이치에 따른 삶임을 경험으로 체화하고 이러한 나의 삶이 세상에 제대로 쓰이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치있는 내가 되어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오만을 버리고 배움에 무릎꿇은 채 깃털이 하얘지도록 견고하게 쌓아온 학습이 예술로 승화되었을 때 우리는 감히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와 격을 지닌 삶의 주인이 된다. 즉, 예술같은 삶을 만드는 길은 지금 발딛고 서 있는 바로 이 곳으로부터 출발하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자의 몫인 것이다.
이에 대해 성공학의 대대대대대가인 'OS마딘(주8)'은 브룩스 주교의 말을 빌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줘봤자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어차피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 숨어 있는 정신 에너지를 밖으로 끌어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돕는 길이다.'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나는 여기서 제대로 교육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해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티포스(주9)가 '훈련된 말'과 '훈련되지 않은 말'에 비유한 것을 차용하여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거듭 강조하지만,
진정한 교육은 그 자체의미대로, 개인의 내면에 지닌 힘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실재과 형이상학의 연결다리 위에서 내 육체는 분주하고 성실하게 마음과 세상을 오가며 수없는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이 모든 조합을 초월로 연속시켜야 한다. 이 분주함과 성실함은 나의 삶에 직결된다. 배움이 힘들고 어려워도 여기서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내 삶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훈련되지 않은 말 취급을 당하게 될 테니 말이다.
훈련되지 않은 말은
목적지를 모른 채 이리 뛰고 저리 뛸 뿐 아니라
자기 감정대로 발광하다 주인을 낙마시켜 목숨을 잃게 만든다.
내 삶을 훈련받지 않은 말취급받도록 팽개치는 것은
배움을 거부하는 것 외에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경우도 매한가지라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닐 경우 우리는 그러한 교육의 위험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위험성에 대해, 2분 성현들의 한탄을 직접 경청하고 깨닫길 바란다. 2성현이 살던 시대와 지금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지만 교육에 대한 이들의 글을 접하며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도 느낀다. 선에 대해, 지식에 대해, 건강과 자본에 대해 그 시대나 이 시대나 제대로 교육되어진 이는 드물다. 제대로 된 교육은 어느 시대나 힘들고 어렵다는 의미겠지...
먼저, 저 세상에서라도 꼭 직접 만나보길 염원하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주10)의 지적이다.
경주할 때에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거나 발로 차거나 해서 사람들은 서로 겨루는데,
훌륭하고 선한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 한 사람 서로 겨루려고 하는 자가 없다.
음악가가 리라의 현은 가락을 맞추는데 자신의 영혼의 상태는 부조화인 채로 있는 것.
수학자들(천문학자)이 태양이나 달에는 눈을 돌리는데 자신의 발밑에 있는 일은 지나쳐버리거나,
변론가들이 정의에 대해서 논하는 데에는 매우 열성인데 이를 조금도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돈을 헐뜯고 있는 주제에 이를 지나치게 선호하고 있는 것,
재산보다도 뛰어나다는 이유로 올바른 사람을 칭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재산을 축적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자들.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들에게 희생을 바치면서 바로 그 희생식의 와중에 건강을 해칠 정도로 성찬을 드는 것.
무엇보다 주인들이 게걸스럽게 먹는 것을 보면서도 주인이 먹는 것을 무엇 하나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노예들..(중략)
이번엔 벤자민 프랭클린(주11)의 자서전에 수록된 내용으로 그가 벤저민 보건에게 받은 편지가운데 일부이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표지판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선생님, 자식들과 부모들에게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보여주십시오.
(중략)
우리는 정치가나 군인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유명세 있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보다 훨씬 더 평화스럽고 순응할만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큰 일을 하면서 가정적일 수 있고,
부러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상냥할 수 있는지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통찰이 깊을수록 명제는 단순해진다.
정리하면,
교육은 나의 실존과 형이상학적 이념을 연결시켜주는 다리이며
이 다리에서 깊이를 더하고 너비를 확장시키기 위해
쉬지 않는 타진과 점검을 지속하는 행위가 '학습'이며
이 학습의 강도와 정도, 탁도를 통해
내 삶은 보다 우아하고 고귀하게,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로 승화된다.
이렇게, 교육은 인간을 공.부.(工夫)시킨다.
'공(工)'은 천(天)과 지(地)의 연결이며
'부(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배움에 대한 자신의 깊이있는 재고, 숙고를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겠다.
지금껏 습관처럼 내 혀에 오르내렸던 단어들, 교육, 학습, 공부의 제대로된 의미대로 나는 걷고 있는가?
이 교육이라는 다리 위에서 나는 제대로 학습하여 제대로 공부되어지고 있는가?
나의 공부가 나의 후손,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나아가 이 세상에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지금부터 나는 무슨 교육을 어떤 태도로 학습할 것인가?
정작...
과연,
주1>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2009, 안삼환 역, 민음사
주2>발타자르그라시안, 나를 아는 지혜, 1997, 류시현역, 하문사
주3,7>올더스헉슬리, 영원의 철학, 2014, 조옥경 역, 김영사
주4>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2005, 손우성 역, 동서문화
주5> 블랙스완 :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예측불가한 상황으로 변화되는 것. 니콜라스나심탈레브의 '블랙스완' 참조할 것.
주6>랄프왈도에머슨, 자기신뢰철학, 2010, 정광섭 역, 동서문화사
주8> OS마딘, 강철의지, 2010, 한상연 역, 오늘의 책
주9,10>그리스철학자열전, 2016, 전양범 역, 동서문화사
주11>벤저민 프랭클린, 프랭클린 자서전, 2009, 이계영 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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