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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Dec 08. 2023

'천둥벌거숭이'로
'벼락'맞지 않으려면

'인생, 삶'에 대하여

이쪽에는 저쪽이 없고 저쪽에는 이쪽이 없다.

행복에는 불행이 없고 불행에는 행복이 없다.

불안에는 평안이 없고 평안에는 불안이 없다.

만족에는 불평이 없고 불평에는 만족이 없다.

수평에는 수직이 없고 수직에는 수평이 없다.

직선에는 곡선이 없고 곡선에는 직선이 없다.

평면에는 굴곡이 없고 굴곡에는 평면이 없다.

고통에는 쾌락이 없고 쾌락에는 고통이 없다.

이성에는 감성이 없고 감성에는 이성이 없다.

암흑에는 밝음이 없고 밝음에는 암흑이 없다.

추위에는 더위가 없고 더위에는 추위가 없다.

기쁨에는 슬픔이 없고 슬픔에는 기쁨이 없다.

과거에는 미래가 없고 미래에는 과거가 없다.

유형에는 무형이 없고 무형에는 유형이 없다.

한계에는 경계가 없고 경계에는 한계가 없다.

유한에는 무한이 없고 무한에는 유한이 없다.

열림에는 닫힘이 없고 닫힘에는 열림이 없다. 

선에는 악이 없고 악에는 선이 없다.

불에는 물이 없고 물에는 불이 없다.

위에는 아래가 없고 아래에는 위가 없다.

땅에는 하늘이 없고 하늘에는 땅이 없다.

시작에는 끝이 없고 끝에는 시작이 없다.


이쪽이 있어야 저쪽이 존재하고 

저쪽이 존재해야 이쪽이 존재하는 것이 삶의 원리.

이쪽에서 저쪽으로 향하는 것이 자연의 길. 

이쪽과 저쪽,

상반된 극과 극의 길사이에 놓인 갈등, 충돌, 혼란, 파괴, 생성, 고통, 불만, 불안...

이 자체가 자연과 삶의 진화를 향한 의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꾸만 이쪽을 피해 저쪽으로 가고자 뭔가를 쫒는다. 

불만을 없애려, 고통을 피하려 한다면 결코 만족을, 쾌락을 얻을 수 없는데 말이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듯이, 우리는 '행위'만을 하는 존재다.

가는 길목 주어지는 대로 우리는 '대응'만을 하는 존재다.

불행에는 불행에 걸맞는 옷을, 쾌락에는 쾌락에 걸맞는 짓을 우리는 '수긍'만을 하는 존재다.



이쪽을 피하거나 외면하면 

저쪽으로 달아나질 거라는 착각은 어리석다.          

고통이 오면 쾌락으로 가는 길목이니 고통스럽다면 그저 수긍하면 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피하면 안되고 피해지지도 않기에, 따라서 즐겨질 수도 없다.

즐기는 것을 더 멀리 밀어버리고 고통을 더 길게 늘이려는 꼴이 될뿐이다.


너무 행복하면 너무 행복에 겨우면 된다.

불행의 굴곡을 거쳐 누리는 권리이니 그냥 그 행복을 누리면 된다.

왜 행복을 애써 자제하고 감춰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행복 다음엔 또 다시 불안과 불행을 만날텐데...  

  

여기에 조금 보태자면,

고통이 지나야 쾌락이 오는 것이니 고통은 의무요, 쾌락은 권리.

의무는 필수지만 권리는 선택이다.

즉, 권리는 누리든 말든 자유다.  

의무를 다하면 자유가 온다.

   

대응과 행위가 반복되면 예측이 가능하고 삶에 원리를 대입하는, 다시 말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과정에 원리를 대입하는 실질적인 이해와 실천이 가능해진다. 이해된 것의 실천이 반복되면, '준비'나 '대비'를 할 수 있는, 우리에게 그 정도의 능력까지는 허락되었으니, '준비'된 사람은 안정으로 '준비'가 덜 된 사람은 불안정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의 행위'이다.     


자,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길에는 손해와 갈등, 충돌이 동반됨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기로 하면 이쪽을 잃는 것, 냅두거나 놔버려야 할 것들이 '손해'요, 가는 길이 낯설어 겪는 것이 '갈등'이자 '충돌'이니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은 다 일이 갈 길을 가고 있다는 증명들이라 나로서는 방해하지 않고 옆으로 비껴서 오는 대로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계속 걸을 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이해도 수월할 것이다.   

  

추위에서 더위로, 더위에서 추위로 가는, '계절'이라 이름 붙여진 기나긴 흐름에서 이쪽이 저쪽으로 가는 진입 내지 어중간한 사이, 즉, 봄이나 가을이라 불리는 그 기간에 성긴 구름이 잔뜩 모여들며 또는, 모여든 구름이 성긴 방향으로 이동하며 격한 전쟁을 치를 때 폭우를, 번개를, 천둥을, 벼락을 만나는 것과 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모든 길을 우리는 '세월'이라, '인생'이라, '삶'이라 이름붙이고 자의든 타의든 그 안에서 구름의 양이 변하며 맑았다 흐렸다 하듯 때로는 맞으며, 때로는 느끼며, 때로는 환호하며 그리 가면 되는 것을. 


그걸 피하고 좋고 편하고 안전한 쪽으로만 가려 하니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벼락맞을 짓'을 스스로 불러오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니라 

이치를 깨닫지 못한 무지에서 자초된 자행이다.     


인생의 시작과 끝이 이러한 원리로 움직이기에

그 어떤 것도 막을 방도없는 무력한 나에게 바라건데, 

이치를, 섭리를, 진리를 따르는 것만이 

피하고 싶은 모든 것들로부터 피하려는 탐욕의 한계를 넘게 날 돕는 것이며

가기 싫지만 갈 수밖에 없다는 인정을 통해 자진해서 의무를 이행하도록 이끄는 것이며

당하기 싫지만 당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 다음 길을 예지케 하는 현명함일테다.     

정신의 두려움은 

빛이 아니라 

이치로써만 떨쳐버릴 수 있음(주)을 깨닫는 바일테다.    

  


주>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2012,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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