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한때 좋아했지만 잊고 지낸 취미가 있나요?
정모가 살아났다!
"정모가 살아났다."는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에게는 사람 이름쯤으로 들릴 이 말이, 내게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는 어떤 시간의 이름이었다. 스윙댄스 동호회의 '정기 모임'. 매주 토요일, 남편과 함께 웃고 춤추던 그 반짝이던 밤들의 또 다른 이름. 그 정모가, 다시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문자를 받고 하루 종일 마음이 붕 떠 있었다.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서 꽤 멀었고, 무엇보다 아이 그리고 남편과 스케쥴을 맞춰봐야 했다. 그런데 정모 날짜를 확인한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 아이와 남편이 학교에서 주최하는 '아빠 캠핑'에 참가하는 날이었기 때문. 정~말 오래간만에 허락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그것도 토요일 밤에!
외출이 확정되자, 들뜬 마음은 어느새 현실적인 고민으로 옮겨갔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 옷장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예전보다 살이 붙었고, 체력도 자신 없었다. 정말, 다시 춤을 출 수 있을까? 설렘 위로 슬며시 걱정이 내려앉았다.
남편과 나는 춤을 추다 만났다. 이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춤추다 만났다고? 와- 춤꾼 부부네! 둘 다 끼가 장난 아니겠는데?"
감탄 섞인 반응에 나는 늘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사실 나는 '음치, 박치, 몸치'다. 음악이 나오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들과는, 태생부터 달랐다. 리듬을 듣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내겐 꽤 큰 성취였다.
잘하지 못해도 당당한 용기, 그게 사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는 종종 아이를 보며 깨닫는다. 아이가 어릴 적,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다. 해외 캠핑카 여행 중, 그저 "Hello, Thank you, Sorry" 정도밖에 모르는 아이에게 조심스레 제안해보았다.
"영어를 좀 더 열심히 배워볼까?"
"나 영어 잘해~!"
순간 웃음이 터졌다. 어이없으면서도 그 당당한 자신감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잘하는 것보다, 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나도 그랬다. 어차피 춤엔 소질이 없으니 괜찮았다. 완벽하게 추지 못해도, 리듬에 몸을 실을 수 있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스윙댄스는 그래서 좋았다. 잘하지 않아도 즐겁고, 어색해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 매주 토요일이면 전 남친(현 남편)의 손을 잡고 스윙바로 향했다. 넓은 홀 한가운데에서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마주보고 춤을 췄다. 그 시간들은 우리에게 연애였고, 청춘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계절이었다. 4년을 함께했고, 결혼을 했다. 세계여행을 떠났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그 토요일 밤의 여유는 어느새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때 그렇게 반짝이던 취미는 자연스럽게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십 년이 훌쩍 지난버린 어느 날, "정모가 살아났다"는 소식이 마음 깊은 곳을 툭 건드렸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든 스윙화는 빛이 바래 있었지만, 그 신발을 신는 순간—몸은 오래된 리듬을 기억해냈다. 마치 어린 시절 타던 자전거처럼, 한 번 익힌 감각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몸이 먼저 기억하나 보다.
스윙 음악은 봄날 같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처럼 가볍고, 적당히 들뜨고, 적당히 느슨하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발끝이 먼저 반응하는 음악. 리듬에 맞춰 발끝을 까딱이며, 오래된 기억을 꺼내보았다. 동작은 서툴렀지만, 마음은 오래 전 그 설렘을 다시 꺼내 들고 있었다.
한때 그렇게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다시 해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이렇게 마음을 흔들 줄은 몰랐다. 남편과 나는 20대에 만나 춤을 추며 사랑했다. 시간은 흐르고, 몸은 변했지만, 우리가 좋아했던 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익숙했던 만큼 낯설어졌고, 설레는 만큼 힘들었지만, 다시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더 이상 '스윙 정모'가 중요한 일상의 부분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해주는 짧고도 반가운 숨구멍 같은 시간이었다.
당신에게도, 마음 어딘가에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취미가 하나쯤은 있다면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지냈던 그 설렘, 그 ‘당신만의 토요일’을 다시 꺼내볼 수 있다면
—그걸로 이 이야기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