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목 금지 사회실험
사회생활에 친목은 필수이다. 친목을 하는 구체적 방법의 하위 항목은 다음과 같다. 호구 조사하기, 근황 인터뷰하기, 밝은 리엑션하기 등.
1. 호구 조사하기 ex) 어디 사세요? 어머 그럼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2. 근황 인터뷰하기 ex) 요즘은 별일 없으세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ㅎㅎ
3. 밝은 리액션하기 ex) 헐 진짜요? 와 대박! ㅋㅋㅋㅋ그러니까요
4. 기타 등등 ex)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오디오를 채우기 위해 필요했던 다양한 이야기들
5. (+최근에 추가!) MBTI 조사하기
친목을 잘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직장인의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사회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친목을 한다. 반응도 열심히, 대화도 내가 먼저 다가가서, 질문하는 쪽도 항상 나!
성실한 친목은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도리이며 더 나아가 일종의 의무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뿌듯하고 좋았다. 나로 인해 분위기가 풀어지면 ‘오늘도 한 건 했다!’는 생각이 들며 해야 할 일을 끝낸 기분이었고 도무지 분위기가 풀어지지 않으면 괜히 내가 뭘 잘못한 것처럼 불안했다. 세상에는 그냥 조용한 모임도 있을 수 있는 건데, 나는 그걸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광대를 자처하여 내가 치는 내 박자에 내가 짤랑짤랑 재롱을 부리고 있는 날들도 생겼다.
이렇다 보니 나는 내가 사람이랑 친해지는 게 너무 좋은가보다 생각했다. 내가 사람이랑 친해지는 것을 좋아해서 친목을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친목은 뭔가를 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라고...!
그런데 내가 다니게 된 뮤지컬 동호회는 여기에 정확히 반대 방향을 제시했다. 동호회 첫 수업 때 선생님께서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안내해 주셨다.
“이곳에서 친목은 금지입니다. 서로 핸드폰 번호도 주고받지 않을 거고 팀 단톡방도 만들지 않을 거예요.”
오잉? 그게 가능한가...? 만나더라도 인사도 안 하고 서로 못 본체 해야 하나? 아니 그럼 연습은...? 진지하게 연습만 하게 되는 건가..? 호에에에... 조금 삭막할지도..^^;;
나를 포함한 다른 분들의 눈에도 수많은 물음표가 지나갔고 그럴 줄 미리 알았다는 듯 선생님께서는 설명을 이어가셨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나중엔 눈빛만 봐도 뭘 하자는 건지 통하게 되고 굳이 친해지려 하지 않아도 무대를 통해 끈끈해지는 게 뭔지 알게 될 거예요. 아직은 감이 잘 오지 않을 테지만 나중에는 분명 알게 되실 거예요.”
확신이 가득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안 되지만 그게 이곳의 방식이라면 기꺼이 따를 수 있었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끈끈함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이도 직업도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가지는 끈끈함이란 무엇일까. 일단 지금은 슈퍼 어색 폭발이라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그래도 아무튼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친목으로 인해 불편했던 작은 기억의 조각을 떠올렸다. 이 동호회에 오기 전에 다른 어떤 뮤지컬 동호회의 1일 특강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동호회를 체험해 보고 싶었던 나는 기꺼이 특강비를 지불하고 주말을 할애하여 먼 길을 떠났다. 안내된 장소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내가 이방인임을 강렬히 느낄 수 있었다. 어색한 첫인사보다도 내게 먼저 안겨진 소외감이 당황스러웠다. 딱히 속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일단 소외부터 당했다. 제길.
하이톤 목소리로 오빠오빠 부르며 장난치는 목소리가 들렸고 그 오빠라는 사람은 약간은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여유롭게 웃으며 서 있었으며 다른 오빠들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 함께 웃었다. 물론 나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므로 웃기지 않았다. 잠시 어색하게 방치되었다가 다행히 운영자인 것 같은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수업하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방 안에는 나처럼 어색해 보이는 몇 명이 더 있었다. 그중 한둘은 핸드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짐작 건데 그분들도 어색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핸드폰이 필요했을 뿐, 딱히 핸드폰으로 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와 대비되어 어떤 여자분은 너무도 여유로워 보였는데, 운영진과 격 없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기존에 계시던 멤버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조용한 와중에 혼자 시끄럽게 대화한다는 점에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구나 찌리릿 삘이 왔다. 왜 내가 허락하지 않은 나의 불편감을 빌려 이상한 우월감을 누리고 있는지 딱 그 지점이 불편했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굳이 편안해지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곧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께서는 한 명씩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다. 불편하면 안 불러도 된다고 하셨으므로 누가 노래를 안 불렀고 누가 레슨을 받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어색하고 불편한 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드디어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그사세’라는 신조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들이 사는 세상. 그들만 즐거운 그 세상에 딱히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그 속에 포함되지 못했으므로 인해 내가 느껴야 했던 그 소외감은 정말 불쾌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보니 친목을 하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모두가 동등하게 편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함께 불편함으로써 모두가 동등하게 편안해지는 것이다! 참으로 유토피아적인 발상이었다. 그래서 이 동호회의 친목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나에게 일종의 흥미로운 사회실험처럼 여겨졌다.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할까. 친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 데도 없다. 좋거나 싫거나 아무튼 꼭 해야 하는 이 친목을 금지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흥미로운 실험에 참여한 나의 후기를 지금부터 발표해 보겠다.
후기: 최고에요! ★★★★★
정말 편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소통했으면 좋겠다.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고 오로지 우리가 이곳에 모인 목적, 연기에만 집중하고 연기에 꼭 필요한 대화만을 나눈다. 사실 대화도 많이 필요 없다. 그냥 냅다 먼저 대사를 시작하면 상대방도 함께 냅다 다음 대사를 해준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함께 성장한다. 너무너무 편하고 효율적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동안의 모든 친목의 시간이 불필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곳에서 친목 없는 사회가 잘 유지된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잘하고 싶다’는 공동의 목적이 강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들 최선을 향해 달리니까 서로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가 든든히 옆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뭉치기 위해 정말 필요했던 건 친해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향한 강한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지금껏 해왔던 친목들에 대해 돌이켜볼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친목을 할 때 내 목적은 그 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아닐 때가 많았다. 내 목적은 사실 ‘어색함 피하기’였다. 나는 가끔 나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과하게 텐션을 올려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건 사실 죽도록 어색해서 나오는 반응임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사회성 있고 친근하게 구는 것은 물론 좋은 능력이긴 하나 정말로 꼭 필요했을지,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는 건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뭐든 너무 극단적일 필요는 없지만 ‘이미 너무 극단적으로 친목이 과한 상태는 아니었을까?’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다. 물론 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고 내 얘기를 하거나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은 대부분 즐겁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왜 모였는지 거기에 더 담백하고 솔직하게 집중해 보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더 괜찮을지 모른다.
동호회에 다니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훨씬 나다워질 수 있었다. 어색함을 피하려 과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친목이 잘 이뤄지지 않아서 불안해하는 경향도 많이 줄었다.
그리고 그들과 전혀 사적으로 친밀해지지 않았음에도,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이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연기만’ 해도 되는 이곳의 사람들이 점점 더 소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