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민속촌, 4.3 사건 기념관
역사와 국어 현대소설을 배우며 제주가 4.3 사건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해 크게 체감하지 못하고 산 듯하다. 제주를 누리면서,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한강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제주에 사는 동안 4.3 기념관에 다녀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드디어, 최근에 4.3 기념관에 다녀왔다.
역사시간에 몇 줄 배웠던 것보다 훨씬 생생하게 알게 됐다. 나도 역사 시간에 몇 줄로만 배웠는데 4.3 사건은 단순히 4월 3일에만 국한되어 일어난 일이 아니고, 6년 동안 일어난 일이며 일제강점기, 신탁통치기, 6.25 전쟁과 이념대립과 관련한 길고 복잡한 역사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이름 없이 진상규명이 된 지도 얼마 안 되었으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지금껏 내가 다녔던 박물관 중 가장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주의 자연을 느끼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역사를 먼저 알고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픈 역사라 마주 보기 힘들지라도, 후손인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제주에 오게 된다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꼭 와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4.3 추모광장, 위령탑 같은 곳이 많다. 그리고 오지 않더라도 이 글을 읽고, 나도 4.3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관심을 조금이나마 가진다면 좋을 것 같다.
평화공원은 전시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대지와 숲, 위령탑, 봉안관 등이 같이 있다. 외부를 간단히 둘러보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처음 시작은 동굴처럼 되어 있다. 4.3 사건 당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되고 주민들은 야산으로 흩어져 숨어 있다 동굴에 은신해 있었다고 한다.
내부는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였다. 전시관은 6관으로 되어 있으며 가는 길에 화살표로 방향이 표시되어 있어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전시 설명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고 느꼈다. 박물관을 어려서부터 많이 다녔지만 사실 지루할 때가 많았는데 이곳은 몰입하며 봤다.
들어가면 동굴이 나온다. 당시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주민들은 야산에 숨어 있다 동굴에서 은신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굴조차 토벌대의 추적에 의해 발각되어 주민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동굴이 끝나면 '4.3 백비'가 나온다. 백비는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고 한다. 제주 4.3 사건은 '폭동'과 같은 단어로 불려 왔으며, 진상규명이 된 지 얼마 안 되었고 아직도 제대로 된 이름도 없어 글을 새기지 못했다고 한다. 후손들의 많은 노력으로,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고, 기억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시관 순서에 따라, 역사적 흐름에 따라 4.3 사건을 정리해 보겠다.
1. 일제강점기, 신탁통치기와 제주
기념관 초기 부분에는 4.3 사건 이전부터 제주의 역사에 대해 담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 일본은 본토가 미군에게 점령당할 것 같자, 제주도를 본토 방어 기지로 이용하려는 '결 7호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이때 투입된 일본군이 7만 명이라고 한데 당시 제주도민이 22만 명이라고 하니 거의 1/3의 인구가 유입된 것이다.
당시에 해안가 곳곳에 특공기지가 설치되고, 진지가 구축되는 등 섬 전체가 요새화되고 제주도민들은 강제 노역과 공출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 전체를 식민지화했지만 그중 제주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로 인해 제주에는 일식 무기가 잔존했으며 일본과 관련해서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지식인들이나 강제징용되었던 사람들이 제주로 들어왔는데, 당시 지식인들은 레닌과 같은 사회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경우가 많아 제주가 이념적으로 좌익으로 몰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제주 4.3 사건이 발발한 계기는 3.1 발포사건이다. 나도 이번 관람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1947년 3.1 발포사건이 원인이었는데 당시 시위 군중이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차이자, 사람들이 돌을 던졌고, 이를 경찰에 대한 공격으로 오인한 경찰들이 시민에 발포한 사건이다. 그때 피격당한 사람들은 시위대가 아니었으며, 6명이 숨졌다. 4.3 사건의 모든 피해자가 그렇지만, 그 발발부터 피해자는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 발포사건 이후 진상조산을 위해 파견된 미군정 조사단은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의 동조자'라고 기술하며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며, 대부분의 제주사람들을 비롯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념과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1945년부터 우리나라는 신탁통치를 받았으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좌익, 우익'이라는 이념을 나눠 대립이 첨예했는데 3.1 발포사건이 1947년의 일이므로 4.3 사건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념의 명목으로 희생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가 '붉은 섬'으로 지목되며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가 제주에 들어와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으며 4.3 사건의 원인이 된다.
3.1 발포사건 이후 제주 95%의 민. 관 직장인들은 3.10 총파업으로 항의한다. 지금은 파업이 노동자들의 권리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당시에 파업은 '사회주의적이다'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사살사건으로 항의했을 뿐이었는데 이로 인해 파업 추모자들은 검거되고, 고문도 행해진다. 이념과 관계없는 농부이고 학생들은 억울하게 끌려가 인권을 유린당하고, 그 사건마저 은폐당한다.
기념관은 이제야 4.3 사건의 정의를 설명해 준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아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쪽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라고 설명한다. 무려 6년 이상 핍박받았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신탁통치와 한국전쟁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제주 4.3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2. 남한 단독정부 설립과 제주
한국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줄 알았던 한국은 남북으로 나뉜다. 현실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익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이에 반대했고, 특히 제주사람 역시 이에 반대해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반대투쟁을 벌이는 제주도민에 대한 경찰과 우익단체의 무차별한 테러는 극심했다.
한편 좌익세력이었던 남조선노동당은 제주에 지하조직을 구축했고, 제주인민광복군은 일본군이 숨겨놓은 무기와 화약을 이용해 무장을 하고 유격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미국층은 경찰병력을 제주에 투입해 좌익세력의 '남한 단독선거. 정부 반대, 반미. 반경찰. 반서북청년단'을 외치는 민중봉기를 진압하려 했으나 사태가 악화되자 군을 투입해 제주 전체를 초토화했다. 이로 인해 제주에서는 5.10 총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5·10 총선거 당시 200명의 국회의원 중 198명만 된 사유는, 제주 4·3 사건에 의해 제주도의 3개의 선거구 중에서 2개의 지역에선 선거가 불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제주군과 제주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 선거가 치러지지 않았으며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의 강경 검거작전 이후 6.23 재선거도 치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제주도는 유일한 선거거부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제주의 선거가 이뤄지지 않자, 미국은 이를 반항이라고 생각하고, 탄압하기에 이른다.
3. 초토화작전
토벌대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중산간마을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림 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초토화작전'을 자행했다는데 비참하기 그지없다.
제주의 특성상 섬이어서 고립되어 있고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고 설명한 문구를 보니 더 가슴이 아팠다.
4.3 사건뿐 아니라 제주는 저항의 전통이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별초의 난, 1901년 제주항쟁, 법정사 항일운동, 해녀항일투쟁 등의 설명이 있었다. 제주의 저항정신이 멋있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점이 마음 아팠다.
4. 4.3 후유증
4.3 사건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주사람 중 가족을 잃은 사람이 많고 아직까지도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좌파라는 오명으로 '레드콤플렉스'가 생겨 후대까지 상처가 있다는 것이 슬펐다. 후손보상이 지금에야 이뤄지고 있다고 하는데 역사가 제대로 알려지고 그들이 아픔을 치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5. 진상규명운동과 오늘
기념관 코스가 꽤 긴데 마지막 부분에선 진상규명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오래된 역사임에 비해 진상규명이 탄압받기도 했고 현대에 이르러서야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늦게나마 이뤄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한강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해서 이와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부끄럽게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문학적 가치도 높은 그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었다.
기념관을 둘러본 후, 4.3 사건을 더 잘 알게 되었는데 그 사건을 기억하고 기리며,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념관 방문을 통해, 제주 4.3 사건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사회적 화해와 평화를 위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4.3 사건을 기리며 그 희생자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