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작물
일 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즈음 수확되는 감자는 여러 가지로 나에게 의미가 깊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겨울보다 뭔가 쑥쑥 자라나는 여름이 좋았다. 그 당시만 해도 “어두워지면 저녁 먹으러 들어와라.”였으니… 해가 늦게 지면 노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더 많아져서 좋았고 물놀이도 할 수 있고 어린 시절 최대 축제인 생일도 있어 기다려지는 계절이었다. ^^
결혼하고 장을 직접 보면서 하지감자를 샀는데 보관을 잘 못해 싹이 났다. 중학교 때 가사 선생님께서 ‘감자 싹에는 솔라닌이라는 독성이 있으니 먹으면 안 된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라 제거하려고 칼을 들었다. 그 순간… ‘인간에게는 독이지만 감자 입장에서는 생명의 연장으로 싹을 틔운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면서 싹 난 감자를 몇 개 남겨놓았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나는 입덧으로 산모가 잘 먹지 못해도 태아는 잘 자란다는 사실과 수분 없이 싹튼 감자 싹이 오버랩되면서 이 싹이 과연 어디까지 자라는지 궁금해졌다. 갈색 표면은 쪼글쪼글 말라가는데 연둣빛 감자 싹은 물을 주지 않아도 정말 쑥쑥 올라왔다. 그로테스크하면서 생경한 경험이었다.
이때 관찰한 감자의 결과가 2001년 <감자 속 사막> 전시다. 1996년 대학원 다닐 때 한 첫 개인전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작업의 첫 시작은 이 감자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현미경처럼 감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잔잔한 결이 있는 흙 표면이 드넓은 대지처럼, 움푹 파인 구멍은 오아시스처럼, 손바닥만 한 감자에서 광활한 사막이 연상되었다.
공기는 덥고 물은 부족한 사막. 탄생의 공간으로는 최악일 수도 있지만 사막에도 생명체가 존재하고 그곳의 생명체에게 이곳은 안락한 자궁이다. 부패한 감자는 양분도 수분도 없어 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최적의 탄생지인 것이다. 인간의 용도 면에서는 ‘소멸’이지만 감자의 입장에서는 ‘생성’이 시작되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죽음과 탄생, 생성과 소멸의 순간...!
나는 그때 썩어가는 감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강인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발견하였고 동시에 ‘엄마’가 되어 다른 세계의 창조도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상적 생명성은 이후 작업의 바탕이 되었다. 누가 일상에서 변화를 실천하고 연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부엌이라고 한 말에 백분 공감한다. 일상 속 평범한 식재료인 감자 한 알이 바삭한 감자 전, 고소한 감자 치즈 오븐구이, 담백한 찐 감자, 부드러운 수프 등등으로 기적처럼 변신한다.
날 것이 익혀진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 음식을 하면서 시장에서 처음 감자를 사보고 요리하고 그림을 그렸던 때가 생각난다. 그게 벌써 20여 년 전 일이라니… 감자는 쌀, 밀처럼 인간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는 주요 식량이기도 하지만 나의 작업 바탕이 된 생명의 근원, ‘자궁’과 같은 작물이다.
긴긴 겨울밤 동지(冬至) 음식이 ‘팥죽’이라면 나에게 여름 낮 하지(夏至) 음식은 ‘감자’다. 식구들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살림’이 ‘그림’ 속으로 들어오게 된, 몸과 정신에 양분을 준 소중한 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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