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색 식물, 녹색 동물
우리 집 부엌엔 늘 토마토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토마토는 쌀처럼 떨어지기 전에 그득 채워 놓는 음식 중 하나다. 전생에 지중해에서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나는 토마토를 좋아한다. 덜 익은 초록과 완숙의 빨간색은 여느 꽃다발처럼 예쁘고 그 맛은 말할 것도 없다. 토마토를 먹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유치원 소풍 때 기억에 남는 음식 중 하나가 ‘V8'이라는 토마토 주스였다. 소풍 가는 날이나 특별한 때 엄마가 가끔씩 남대문 시장에 가서 알록달록한 캔의 사이다, 환타, 막대사탕, 캐러멜 등 재밌는 음식, 소위 ‘fun food’를 사 오셨는데 그 먹을 것 보따리에 아담한 크기의 V8 캔 주스가 있었다. 나는 그 주스를 토마토와 함께 한약 같은 향이 있어 좋아했는데 그 향은 나중에 알고 보니 셀러리 향이었다. 당시 엄마는 어린애가 이런 음료를 좋아한다고 신기해하시며 남대문 시장에 가실 때마다 묶음으로 된 V8 주스를 사다 주셨다. 하나씩 뜯어 야금야금 마실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 후 고3 여름, 장염에 걸려 고생했을 때 나를 살려준 음식이 노상에서 파는 ‘밭 토마토’였다. 요즘 마트엔 토마토가 늘 보이지만 내가 어릴 때는 초여름이 되어야 토마토를 먹을 수 있었다(세대차 ^^). 속도 울렁거리고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도 없어 고생했었는데 지나가다 맡은 토마토 향에 잃었던 식욕이 되살아났던 기억도 난다. 지금도 차멀미를 하거나 속이 울렁거릴 때 토마토를 먹으면 신기하게도 쭉 가라앉는다. 음의 기운이 있는 토마토는 성질이 차서 생으로 먹는 것보다 익혀서 먹는 것이 좋다. 양파나 마늘, 부추, 후추 등 양의 기운이 있는 따뜻한 것을 추가하면 음식의 궁합도 잘 맞고 흡수율도 훨씬 좋아진다. 음양의 조화를 몸으로 실감한다. 서양인들이 해장국으로 토마토 수프를 먹는다고 했을 때 ‘엥?’ 했었는데 이제는 몸으로 공감이 간다.
초여름이 제철인 토마토는 엄청난 자외선을 받으면서 살기 위한 본능으로 색(色)을 발한다. 토마토의 붉은색 라이코펜, 가지의 보라색 안토시아닌이 바로 항산화 물질이다. 늘 식탁에 있어 자주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토마토 그림이 많아졌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나는 토마토에서 ‘정중동(靜中動)’을 느낀다. 동물보다 움직임이 적어 정지한 듯 보이지만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적색 식물. 녹색 피부의 동물 같기도 하다. 물컹한 과육이 질긴 줄기로 얽혀 있는 모습. 솜털 같은 가시가 박힌 꼭지들. 같은 줄기에 달려있는데 서로 생장 속도가 다른 열매들을 보면서, 저마다 성장 속도가 다른 ‘육아’를 떠올리기도 했다. 시기가 다를 뿐 언젠가는 꽃도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구나. 쉬운 듯 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으면 의사 얼굴이 파랗게 된다’는 속담도 있다던데.. 자기주장이 강한 달달한 과일과 다른 맛을 포용하는 채소의 양면이 보이는 토마토는 나와 궁합이 잘 맞는, 곡식과 같은 주식이기도 하다. 아주아주 나중에 시장에서 사지 않고 밭에서 직접 키워 따먹는 날이 과연 오려나. 베란다 창문 통과하는 빛 말고 햇빛으로 직접 익힌 음식들이 먹고 싶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나의 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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