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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09. 2022


무지개 밥상: 오이와 완두

초여름을 알리는 연둣빛 식재료

붉은 물 가득한 오이다. 물컹한 오이지만 솜털 같은 가시로 "나는 그냥 물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듯하다. 꼭지와 구멍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본다.



요새는 ‘부엌’보다 ‘주방, 키친’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부엌’이란 단어에 정감이 더 간다. 이곳은 날것이 익혀지면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공간이기도 하고 ‘식구(食口)’에게 매끼 영양분을 제공하는 생명의 공간이다. 예전에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부엌데기 같은 살림의 노동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란 말도 있듯이 ‘어차피 할 일이라면 정성껏 하자’ 쪽으로 마음을 바꾸니 요리가 즐거워졌다(마늘 까기는 여전히 귀찮긴 하지만…). 


“도(道) 닦는 것이 멀리 있지 않구나. 발〔辶〕로 걸으면서 머리〔首〕로 생각하는 것이 ‘도’라고 한다면, 바로 생활 속 부엌에서 도를 실천할 수 있겠네”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예전에는 못 느꼈던 몸속 기관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점점 “내가 먹는 것이 곧 나”이고 이제는 내 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란 생각이 들었다.


 리넨 패널에 세로로, 가로로 대립되게 배치해  과슈, 아크릴로 그린 2022년 초여름의 오이 덩어리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면서 다양한 야채와 채소로 밥상이 점점 ‘컬러풀’해지고 있다. 겨울에는 무채색 나물들이 많은데 초여름 식탁엔 무지개도 뜨고^^ 알록달록 색감으로 눈이 즐겁다. 요즘은 오이를 사시사철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역시 오이는 더울 때 먹어야 제 맛이다. 햇빛이 익힌 제철 음식을 먹으면 내 몸과 땅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생존하니까. 염분의 땀을 빼고 먹는 시원한 오이 미역 냉국, 꼬들 질감의 오이지, 겨자, 식초의 새콤 버전 오이 절임, 노란 콩국수의 초록 고명… 아삭거리면서도 물이 많은 오이는 여름을 알리는 수박의 미니 버전 같은 느낌이 든다. 차이라면 달지 않은 채소 오이는 반찬으로 만들고 달달한 과일 수박은 후식으로 쓰인다는 차이랄까. 몸속 부족한 수분을 구석구석 채워주는 오이와 수박, 둘 다 본연의 여름 물 맛이 있다. 


신선한 오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가운데 부분을 더듬어보면 뾰족한 가시가 있다. 심지어 꼭지의 솜털 같은 가시에 찔릴 때도 있다. 물컹하면서도 단단한 오이가 “나는 그냥 물이 아니야!”라고 성깔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결코 순하지 만은 않은 이 채소를 초록이 아니라 붉은색으로 그렸더니 매우 낯설게 느껴져서 <낯선 열매>라는 제목을 붙인 그림이 있다. 


초록 오이는 붉은색으로 <낯선 열매>가 되었다. 거친 질감 표현을 위해 장지에 진주분, 백토를 사용하였다.


가시를 품은 물 많은 <두 오이>는 면 리넨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을 사용하였다. 


<두 극>은 오이 꼭지를 대비시켜 화첩 형식으로 장지에 입체로 표현하였다.


연둣빛 완두콩도 시장에 나오는데 보기만 해도 아기를 보는 것처럼 미소가 지어진다. 형태나 색감이 그렇다. 피타고라스는 어떤 인간은 죽으면 완두콩이 된다고 했다던데... 콩깍지 안에 쪼르르 자리 잡고 있는 완두콩을 보면서 <동상이몽(同牀異夢)>란 단어가 떠올라 그린 작품이 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데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잠재된 덩어리들. 완두콩은 무성생식, 자화 수정으로 생식을 위해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귀여운 이 완두콩은 결혼을 자기 자신과 하는 셈이다. 중,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멘델의 유전자 법칙에 관해 배울 때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콩을 별로 안 좋아하는 둘째가 완두콩은 두말없이 먹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고마워졌다. 완두콩의 신비한 마력이다. ^^


면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로 그린 <동상이몽>.  콩깍지를 보았다. 같은 엄마 배에서 태어났지만 너무나 기질이 다른 두 아이가 우리 집에 있다. 


고기와 곡류가 많은 밥상보다 푸성귀가 가득한 여름 밥상에 무지개가 뜬다. 시각적으로 즐겁다. 앤서니 홉킨스는 “인생은 컬러풀하고 이는 살아있다는 증거” 라 하였다. 백분 동감한다. 가벼우면서 풍성한, 다채(多彩) 로운 ‘무지개 밥상’에 몸과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진다.


밥상 위에 뜬 무지개. 초록 완두와 노란 파프리카, 보라 가지의 조합도 맛있다.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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