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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10. 2022

붉은 물: 수박

여름을 알리다

<붉은 물>  장지에 백토, 안료_162x130cm_2019 수박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보색 대비 대표 과일이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 7월이다. 여름을 알리는 과일의 최고는 단연 수박이다. 수박처럼 신기한 과일도 없는 것 같다. 초록 껍질을 반 가르면 나타나는 붉은 덩어리의 반전! 수박에 관한 잊지 못할 기억들이 몇 개 있다. 1985년 중학교 때 수박을 거의 한 통 다 먹고 체해서 태어나 처음으로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았던 기억. 나는 아파서 정신이 없는데 의사 선생님께서는 체구도 작은 학생이 무슨 수박을 그렇게 많이 먹다 체했냐고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토사곽란’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9년, 유난히 수박을 좋아하는 첫째 아이가 입시생일 때 무거운 수박을 끙끙대며 열심히 사다 날랐다(당도 높은 수박을 사겠다고 퉁퉁 두들겨보던 수박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맴..^^*).  


수험생의 수박으로 기억되는 2019년 여름은 9월 개인전을 앞두고 유난히 덥고 힘들었다. ‘엄마’와 ‘작가’라는 역할 속에서 둘 다 모자라고 어정쩡했다. 하지만 식탁에서 발견한 수박의 생경함, 이런 먹거리 채소, 과일들은 일상의 지겹고 익숙한 존재에서 빠져나오는 출구이자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다. 노동의 영역에서 발견한 소재가 작업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이랄까. 분주한 동선으로 물리적 제약이 많을수록 공상이 많아지는, ‘상상 여행’이 시작되어 수박을 소재로 <붉은 물>이란 그림을 그렸고 전시 제목은 <잠재된 덩어리>가 되었다.


최혜인 개인전 <잠재된 덩어리> 도록과 갤러리 도스 전시 장면_2019  바닥까지 하얀 갤러리 배경이라 100호(162x130cm) 작품의  붉은 색이 더 강렬해보인다.


수박 단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붉은 단물 속에 검고 노란 씨가 켜켜이 층을 이루며 박혀 있었고 고기 덩어리 같은 섬세한 결이 눈에 들어왔다. ‘과육(果肉)’이 이런 건가 싶었다. 식물이면서도 동시에 동물적인, 양면성을 지닌 묘한 느낌의 단어.


수박의 ‘붉은 물’ 덩어리가 핏덩어리 생명을 품고 있는 자궁의 양수처럼, 고여 있는 피처럼 느껴졌다. 수박의 둥근 구멍은 여성의 성기처럼, 깊숙한 땅처럼 보이기도 한다. ‘붉은 물’은 씨앗을 품고 순환시키며 생명을 키우는, 양생(養生)의 물이다. 물로 가득 찬 수박은 남아프리카의 건조한 사막 지대가 원산지다. 척박한 땅에서 양분을 얻기 위해 뿌리를 길게 내린다. 물이 부족한 생육 과정에서 물 덩어리 과육이 나오고 가뭄 들 때 오히려 풍작이 되는 과일이라… 아이러니다. 뭔가 조건이 충분한 환경보다 ‘결핍’의 상황이 성숙을 부르나..? 식물도 과잉 물 주기보다는 차라리 덜 주는 것이 생존력이 더 강해진다. 육아도, 작업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수박 단면 사진, 스케치와 그림의 부분도. 검정, 노랑 씨들이 붉은 물에서 유영하는 듯하다.


수박의 꽃말은 ‘큰 마음’이다. 엄마처럼 큰 마음으로 포용하고 생명을 키우는 물로 가득 찬 수박. 조선 시대 ‘어머니’ 신 사임당의 그림에 수박이 등장하고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도 수박 그림이었다. 탈진하듯 힘들었던 그 해 여름에 그린 수박 그림은 후에 감사하게도 공공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선정되었다. 어렸을 때 나를 구해준 ‘링거 주사’처럼 메말라가는 나에게 작업을 지속할 힘을 준, 가뭄에 촉촉한 단비 같은 생명의 물 덩어리였다. 어제 다 먹었는데… 다시 수박 사러 가야겠다. ^^


2020년 성남 큐브미술관 신 소장품전 포스터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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