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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10. 2022


살 속에 박힌 씨앗: 복숭아

관능적인 생명 덩어리

말캉한 속살 정중앙에 자리 잡은, 육중한 복숭아 씨앗


복숭아를 다 먹고 무심코 씨를 버렸다. 둘째가 초등학생일 때 그 장면을 보고 “씨 버리지 않고 심으면 싹이 나지 않아? 우리 키워보자.” 하는 말을 듣고 ‘그렇지! 씨는 음식 쓰레기가 아니라 어떤 생명 덩어리지!’란 생각이 퍼뜩 스치면서 심어보았다(물론 수확은 하지 못했다 ㅠㅠ).


왼쪽부터 <흩어진 씨앗들>, <살 속에 박힌 씨앗>, <모여있는 씨앗들>의 전시 장면. 수박, 복숭아, 키위 씨앗들이다.


수박의 흩어진 씨앗들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한 개의 복숭아 씨앗
 모여있는 키위 씨앗들


그 후 여름 과일의 씨앗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복숭아 씨앗은 부드러운 속 살 가운데에 육중하게 박혀 있었다. 깨처럼 작은 키위 씨앗은 중심으로 모여 있었고 수박은 과육의 층을 달리하면서 툭툭 흩어져 있었다. 씨앗의 생김새와 과일에 박혀 있는 형태의 다양함에 감탄했다. 이때 그린 그림이 복숭아 소재의 <살 속에 박힌 씨앗>, 키위의 <모여 있는 씨앗들>, 수박의 <흩어진 씨앗들>이다. 망고나 아보카도처럼 크고 단단한 씨앗은 가운데 하나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박혀 있었고 딸기 같은 작은 씨앗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말캉한 과육들 안에 씨앗은 크건 작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살 속에 박힌 씨앗> 리넨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100x80cm_2021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공존한다.


<휴면기 씨앗> 리넨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100x100cm_2017  발아를 위해 기다리는 휴면 상태를 연꽃처럼 표현하였다. 


복숭아 씨앗을 소재로 한 작품들. 왼쪽부터 <홀로, 무리로>, <시작과 끝>,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 리넨 캔버스에 과슈, 아크릴_65x53cm_2019


씨앗은 과학적인 DNA의 정보와 함께 수많은 시간과 기억의 층을 지닌다. 한 나무의 삶과 죽음, 자연과의 상생이 이 한 톨에 다 담겨 있다. 발도 없고 날개도 없는데 바람에 따라, 곤충과 새의 도움으로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뿌리를 내리고 주변과 상생의 관계를 맺는다. 생명체는 다르면 다를수록 적응력이 강해지고 생존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이 서로의 공존을 허용한다(나는 이런 ‘다름’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은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동한다. 하지만 식물은 그 자리에 남아 ‘적응’하는 방법을 택한다. 형태를 바꾸거나 외부의 도움을 빌거나 내부에 생화학적 요소를 만드는 방법으로 생존을 위해 답을 찾아내는 것이다. 관계 지향적인 여성의 삶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앗은 동적인 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관능적인 생명 덩어리다. 나는 도시에 살면서 씨앗을 통해 자연의 뿌리를 상상한다. 인간의 몸을 흙과 동일한 바탕, 마음을 유동적인 물이라고 생각해 본다. 흙은 생명을 품고 물은 이를 순환시키며 각각의 씨앗을 ‘양생(養生)’한다. 싹을 틔우며 생명의 여정을 시작하는 씨앗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잠재된 생명력으로서의 환상을 나에게 선사한다.   


한 여름 복숭아를 다시 만난다. 복숭아는 솜털로 알레르기를 유발하기도 하고 귀신을 쫓는 과일로 제사상에 놓지 않는다. 도화색 피부, 미인을 상징하기도 하는 복숭아는 조선 서탁에서 연적으로 제작되어 사랑받았다(선비들이 공부할 때 ‘음심’이 발동하진 않았을까 하는 짓궂은 상상도..^^) 향긋한 복숭아는 껍질을 씻을 때 오이 가시처럼 성깔이 느껴지기도 하는, 결코 물렁하지만은 않은 과일이다. 


조선 선비 연적으로 사랑받았던 복숭아 연적


복숭아꽃이 흐드러져 피어 있는, 소위 이상향인 ‘무릉도원’. 조선 초 안평 대군처럼 이런 파라다이스의 꿈을 아직 꾸진 못했지만 탐스런 복숭아의 과육을 보면서 ‘나만의 무릉도원은 어디일까…?’ 상상해본다. 그러다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 결국 이 현실이 무릉도원 아닌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살 속에 박힌 씨앗>에 관한 작품 리뷰_2019.7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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