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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혜인 Hye in Choi Sep 11. 2022

다산, 다작: 포도와 석류

건강한 번식력

여름이 깊어가는 8월의 포도


여름의 상징인 수박, 복숭아도 지나가고 포도가 등장하는 8월 말이다. 더위가 그쳐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니 매미에서 귀뚜라미로 배경음악이 바뀌고 있다. 정확한 절기…! 아침, 저녁엔 가을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한낮은 여전히 강렬한 여름의 존재감이 남아있다.


농부의 수고로운 한 해 농사의 풍년, 흉년이 이때 결정된다고 하니 곡식을 여물게 하는 뜨거운 햇볕이 고맙기도 하다. 주렁주렁 달린 포도와 석류 알들을 보면서 ‘다산(多産)’이란 단어가 절로 생각났다. 작품도 ‘다작(多作)’을 하라고 하던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 교수가 학기말 작품 평가의 두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먼저 본인이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 1점만 제출하는, ‘질(質)’을 우선시하는 방법과 두 번째는 질과 관계없이 ‘수(數)’가 많을수록 A를 받는 방법이었다. 결과는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은 작품 수에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머리로 고민만 하는 것보다 실제로 행동하라는 뜻이겠지.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나오는 정직한 작품들이다.


옛 그림에 많이 등장하고 혼인 선물로도 인기 있었던 포도를 그려보았다. 견에 오리나무로 염색 후 석록(石綠) 안료로, 한지(장지)에는 염색 후 백토, 금분을 사용하여 전통 채색 기법으로 제작하였다(견은 종이와 달리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 조선시대 임금의 초상화는 거의 견에 그려졌다). 동글동글한 포도 알 형태는 어릴 때 알록달록한 사탕처럼 그리는 즐거움을 주었다. 


견에 오리나무 염색 후 석록 안료로 그린 <번식하다>. 다양한 초록색과 동글동글한 형태로 건강한 생장을 보여준다.


순지 패널에 금분, 안료를 사용해 그린 <번식하다>. 두 겹의 유리로 마감된  호두나무 액자다. 투명 유리 매트 형식이라 걸리는 벽에 따라 배경색이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석류는 나에게는 미지의 과일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때『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처음 보고 도대체 어떤 생김새와 맛을 지녔기에 미인에 비유되는지 궁금했었다. 이후 조선시대 책가도에 그려진 것을 보고 ‘아니, 조선 시대에도 석류가 수입되었나?’했다. 당시엔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을까? 고대 양탄자 염료로도 쓰였다던데… 이란에서 수입된 물류의 흐름에 감탄하면서 이를 처음 먹었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페르시아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석류를 자를 때 손도 붉게 물들고 사방에 피처럼 튀어 뒷정리가 힘들긴 했지만 이 수고로움은 석류의 ‘아름다운’ 맛으로 모두 용서가 되었다.

장지에 백토, 안료로 그린 <열리다>는 석류의 열리는 형태뿐 아니라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엄마 가슴처럼 따뜻하고 양분이 가득한, 모유 수유 같은 <붉은 물길>은 순지에 백토, 안료를 사용해 표현하였다.


영롱한 붉은 석류 알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 결국 손이 비칠 정도의 얇은 순지에 무채색인 연필과 목탄, 먹, 들기름을 사용해 <기다리던 순간>이란 그림을 그렸고 이는 2006년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식물 기행>에 발표되었다.


<기다리던 순간>은  만개한 꽃처럼, 폭죽처럼 터지는 절정 이미지를 표현하였다.


최혜인 개인전 <식물 기행> 전시도록_학고재 화랑_2006


다작은 어떻게 할까? “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글은 영감(靈感)이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것 아닐까요? 문학은 예술이지만 소설 쓰는 태도는 어쩌면 ‘자기 계발’의 세계일지도 모릅니다”는 윤종신의 인터뷰와 “번뜩이는 영감(inspiration)’을 기다리는 것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하던 일을 하러 간다”는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의 말을 되새겨본다. 


나는 먼저 깨닫고 수행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보다 점진적 수련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점수 돈오’에 마음이 더 간다. 반복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일상이 되어 인생을 바꾼다. 그러나… 작업 시 생각 없는 반복은 제일 경계해야 할 일!


석류의 다양한 이미지를 푸른 바다 위 <부푸는 씨앗>(왼쪽)으로, 붉은  땅 속 <씨앗 덩어리>(오른쪽)로 표현하였다.


<부푸는 씨앗> 부분도
<씨앗 덩어리> 부분도


20-30대는 새로움을 흡수하고 실패하면서 경험하는 시기였다. 50대라는 나이에 흠칫 놀라기도 하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옛 선조들이 사경을 필사할 때 목욕재계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하는데 나는 작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실제 생활에서 길을 잘 못 찾아 헤매는 편인데 작업에서도 같은 느낌이다. 미련하지 않은 ‘다작’의 수련 속에서 작은 깨달음을 위해… 거북이걸음이지만 오늘도 작업을 지속한다.


<인력> 장지에 금분, 먹, 백토, 안료_124x185cm_2019
<인력> 부분도


http://www.hyeincho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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