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별이와 빛이가 세상에 나오고 처음 맞는 나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일선물 뭐 해줄까?” 아내의 물음에 고민하다 등짝 스매싱을 각오하고 조심히 입을 뗐다. “타투”
기왕 시작한 타투이니 남자의 로망인 등짝에 대문짝만 한 타투를 하고 싶었다. 의외로 나의 아내는 “그래, 알아봐라.”하며 쿨하게 승낙해줬다. 아마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타투라고 생각하여 무엇을 새길까 고민하다 나의 좌우명을 새기기로 하였다. 원래 20대까지만 해도 나의 좌우명은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었다.
정신을 한 데로 모아 바라고 바라며, 하고 또 하다 보면 이루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생각 하나로 나름대로 성취한 일들이 있으니 나에게는 더 의미가 큰 좌우명이었다. 학창 시절에 뽀로로처럼 노는 것이 제일 좋아 공고를 진학하고, 공부도 안 해 대학도 안 나온 놈이 27살에 번듯한 직장을 가진 것도, 29살에 가정을 이루고, 비록 은행의 돈이기는 해도 내 집과 내 차가 생긴 것도 다 이 정신 하나로 밀어붙인 덕이다. 그런데 요새 아이 낳고, 참 많이도 약해졌다. 불 같던 성격도 많이 유순해지고, 20대 초중반에 넘쳐나던 열정과 패기도 많이 사그라들어서 이전처럼 무작정 정신 하나로 밀어붙이는 것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이제 정체성을 다시 찾고, 그에 맞는 좌우명을 새로 정할 때가 된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냥 내가 아니라 가장이고 아버지인 ‘나’다. 이제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다시 정리할 때가 왔다. 그래서 이 앞의 삶을 헤쳐나갈 나의 좌우명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의 근심지목 풍역불올(根深之木 風亦不扤)로 정하였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집의 제목처럼 우리는 삶을 살며 큰 바람에 또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기 일쑤이다. 우리는 당연히 크든 작든 바람에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흔들릴 때 흔들리더라도 뿌리는 굳건하게 땅을 잡고 서 있어야 한다. 뿌리가 뽑힌 나무는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썩어간다. 우리의 정신과 마음 또한 같은 이치이다. 흔들릴 때 흔들리더라도 정신과 마음의 근간은 단단히 잡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뿌리 깊은 거목이 들짐승과 날짐승에게 안락한 쉼터가 되어주는 것처럼, 우리도 아이들에게 안락한 쉼터를 제공해주어 아이들의 정서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세상만사 일관된 태도로 사는 것이 좋지만, 육아를 할 때 부모의 양육방식은 더더욱 일관되어야 한다. 시시 때때로 변하는 육아 방식은 바다 한가운데의 기후처럼 예측할 수 없기에 아이에게 더 큰 정서불안을 초래하고, 부모를 믿을 수가 없게 만든다. 당연히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성인으로 자라도 어른이 아닌 ‘어른 아이’가 된다. 화가 많은 상사, 우울하거나 불안한 정서를 가진 직장 동료, 주눅 들어 실수가 늘어 가고 있는 신입 전부 ‘어른 아이’인 것이다. 어렸을 때 거목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우리 아이를 ‘어른 아이’로 키우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일관된 양육방식을 취해야 하고, 그 방법은 항상 왜 이런 마음을 먹었는지 확실히 정리하고, 흔들릴 때면 돌아봐야 한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것도, 저것도 다 맞다.’는 말이 아니다. 항상 명언은 제대로 뜯어보고 여러 번 곱씹어 해석해야 한다. 내가 해석하기로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은 부모에게 확고한 가치관이 있고 선택한 육아방식에 명확한 이유가 있으며, 일관된 태도가 뒷받침된다면 그것이 정답이라는 말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이를 울리지 말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이를 달래지 말아라.’고 한다. 아이를 울리든 안 울리든 중요한 것은 왜 울리지 않는가, 왜 울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육아의 종국적인 목표는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가족과 친지 하나 없어 기댈 데 없는 객지 생활을 하며, 쌍둥이를 키우는 환경도 한 몫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일찍이부터 ‘독립’을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잘 달래주지 않는 육아를 택했다. 우리 부부도 마음이야 쌍둥이 별이와 빛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언제나 아이들의 온기를 나누고 싶지만, 언제까지고 우리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스스로 누워서 자기를 바랐고, 스스로 감정을 잘 다스리기를 바라며 일찍이 그 방법들을 가르쳤다.
별이와 빛이는 한 돌까지 참 많이도 울었다. 물론 나도 한 돌까지는 아이들에게 훈육도 하지 말고, 그저 사랑과 관심을 듬뿍듬뿍 줘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울 때면, 안절부절못하고 흔들리기도 했다. 또 지금 돌이켜 생각할 때 ‘그때 그렇게 많이 울리지 말걸.’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이렇게 확고하더라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항상 왜 내가 이 길을 택했는지 돌아보고, 또 여러 규칙을 세웠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들이 울 때 바로 달래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스스로 슬픔,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보고,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연습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갓난아기일 때부터 울 때 바로 달래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울 때 3~5분 정도는 우는 아이 옆에서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지켜보다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들 때만 개입하였다.
나의 이런 엄격한 육아를 잘 따라 준 덕분에 별이와 빛이는 한 돌이 지나면서부터 울음이 확 줄었다. 넘어져도 웬만해서는 잘 울지 않고, 툴툴 털고 일어나는 녀석들을 보면 참 대견하다. 그리고 감정 추스르는 법도 많이 늘었다. 발음과 같이 욕이 나온다는 18개월에도, 자아가 형성되는 제1 반항기에도 별이와 빛이는 갓난아기 적부터 단련된 내공으로 터진 감정을 잘 추스르며, 잘 따라오는 중이다.
결국 울리느냐, 울리지 않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명확한 육아관과 명분이 있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마음과 어떤 이유로 어떤 육아방식을 택했다면, 그 뿌리를 단단히 박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상록수(常綠樹)가 되어 아이들이 믿고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부모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