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 또 하루만 더 살자
사람에게는 살고 싶은 욕망과 죽고 싶은 욕망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떠올라 있는 욕망이 둘 중 무엇인지는 몰라도, 마음속을 잘 살펴보면 나머지 욕망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살고 싶은 욕망과 죽고 싶은 욕망이 공존합니다. 얼마 전까지, 죽고 싶은 욕망이 제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참 괴로웠던 시기죠. 그 욕망을 뿌리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이런저런 방법들로 저를 호시탐탐 죽음으로 이끌으려 노력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쪼개서 살고 싶은 욕망에게 나누어 줬거든요.
하루만 더 살자
우리 안에 살고 싶은 욕망을 '살림이'로 부르고, 죽고 싶은 욕망을 '죽음이'로 불러보겠습니다.
하루만 더 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살림이에게 떼어주었습니다. 그것을 삼일로, 일주일로, 한 달로 늘렸습니다. 그러자 죽음이가 점점 웅크리는 자세를 취하더군요. 그 대신 그 녀석은 아직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 뒤, 삼일 뒤, 한 달 뒤의 저의 삶을 더 세게 쥐고 내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살림이가 전보다 기운을 차렸습니다. 저는 다시 하루에 세끼를 챙겨 먹게 되었고, 카페인 없이도 깨어있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봄이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위험한 계절이라던데, 저는 다행히도 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꽤 자주 죽음이가 저의 오늘을 앗아가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저는 봄의 풀잎 향기를 한껏 들이켰습니다. 하루만 더 살면 됐으니까요. 삼일만, 일주일만, 한 달만 더 살면 됐으니까요.
하루만 더 살자는 다짐은 오늘 하루만큼의 마음을 살림이에게 떼어주는 행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로부터 오늘 하루를 빼앗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저, 내일을 죽음이에게 주기로 마음먹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죽음이는 애쓰지 않고 내일에 만족합니다. 자주 오늘을 넘보긴 하지만, 대체로 내일에 만족합니다. 그리고, 한 번 오늘 하루를 빼앗아 살림이에게 떼어주고 나면, 살림이에게 활력이 생깁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지켜내겠다는 힘이 생깁니다. 그렇게 살림이에게 오늘 하루를 선물하고 나면, 살림이는 기쁨으로 보답합니다.
많은 분들이 죽음이와 직접 사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종래에는 죽음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죽음이와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서는 살림이와 연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혼자서는 죽음이와 싸워서 이겨낼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애초에 신은 우리에게 그런 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살림이를 우리 안에 넣어준 것이죠.
살림이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오늘로 충분합니다. 대신 오늘을 충분히 주어야 합니다. 밥 한 톨의 식감, 물 한잔의 온도, 날씨가 주는 추위나 더위를 한껏 느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림이는 그것들에 기쁨으로 보답합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살림이가 주는 기쁨이 곧 행복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오로지 내 안의 살림이만이 줄 수 있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오늘도 행복할 자신이 없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살림이도 축 늘어져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봅니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형광등의 빛, 모니터의 모서리, 키보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키에 눈을 두어봅니다. 그러면 살림이는 호기심을 가지고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삶은 이미 너무도 충만하게 저희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기쁨의 재료들을요.
죽음이에게는 미래만을 선물로 주고, 살림이에게 오늘을 선물로 줍니다. 그것이 해법입니다. 그것이 죽음이를 제 자리로 보내주는 방법입니다. 언젠가 노쇄하여 죽을 날이 오면, 죽음이와 함께 덤덤히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죽음이에게는 그 날을 선물로 주면 됩니다. 살림이에게 오늘을 맡기면 됩니다. 그것이 오늘도 살아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