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은 찾아오고 불행은 떠오르며 정신은 승리합니다.
커다란 불운이 나에게 찾아올 것만 같습니다. 커다란 불행이 나에게 찾아올 것만 같습니다. 두 문장은 같아보이지만 다릅니다. 불운과 불행은 다릅니다. 불운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며 막을 수 없습니다. 불행은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건져내면 그만입니다.
한 소녀가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그러다가 운이 없게도 음주운전 차량과 부딪힙니다. 운전자는 사망했지만 소녀는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사지마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소녀에게 그렇게 불운이 찾아왔습니다.
병실에서 깨어난 소녀는 자신의 상태를 전달받습니다. 불행이 떠오릅니다. 마음 위로 불행이 떠오릅니다. 소녀는 불행을 주체할 수 없지만, 몸을 쓸 수 없는 까닭에 아무런 몸짓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렵사리 뱉어지는 목소리로 '불행해...'라고 탄식할 뿐입니다.
어느 날 소녀는 병실의 창 밖을 응시합니다. 나뭇잎과 하늘을 바라봅니다. 문득 창가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소녀는 걸을 수 없습니다. 기어갈 수도 없습니다. 소녀는 또 한 껏 애를 써 겨우 한 단어를 뱉어냅니다. '나는 불행해...'
소녀는 어느 날 퇴원하게 됩니다. 더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는 말과 함께 휠체어로 옮겨집니다. 소녀는 마침내 병원 밖으로 나섭니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병원 밖을 경험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비가 내립니다. 풀들이 흔들립니다. 응급차에서 침대에 눕혀진 남성이 병원 안으로 옮겨집니다. 소녀는 문득 마음에서 불행이 지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것을 굳이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소녀의 마음 속이 경외심으로 채워집니다. 세상에 대한 경외심. 삶에 대한 경외심. 소녀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소녀에게 찾아온 것은 불운이었지만 소녀에게 불행은 떠올랐을 뿐입니다.
'정신 승리'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자가, 머릿속에서 스스로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스스로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정신 승리냐에 따라 그것은 깨달음이 됩니다. 거짓된 합리화와 거짓된 가치부여, 삶이라는 투쟁으로부터의 회피를 정신 승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깨달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물론적 세계 그 자체를 목도하는 순간, 나의 현존을 경험하는 그 순간, 우리의 정신은 승리하게 됩니다. 삶이라는 투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신 승리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정신의 승리입니다. '진정한 승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달아야만 우리의 정신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가 덧없음을 깨닫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진정한 승리를 거머쥐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십억의 자산을 가져보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명예를 얻어보고, 완벽한 외모와 신체를 가져보면 그것들이 덧없음을 깨달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하지만 아쉽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런 승리를 거머쥘 수 없습니다. 1등에게만 주어지는 상품을 모두가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그런 승리를 거머쥘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것을 거머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보면서, 진정한 승리의 덧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X(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승리를 뽐내는 시대입니다. 이는 깨닫기 너무도 좋은 시대입니다. 그들은 굳이 왜 SNS를 통해 진정한 승리를 과시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진정한 승리는 마음에 행복을 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쟁취하는 순간의 쾌락은 너무도 잠시입니다.
그것은 아주 비싼 요리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입에 머금고 있을 때는 경이롭지만 이내 그것들은 물컹한 죽이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다. 그러고서 남는 것은 허탈감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요리가 내어지는 그 순간을 사진에 담아 SNS에 업로드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이 음식을 입에 머금는 순간 느낄 경이로운 맛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질투합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전혀 부러워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얼마나 그 쾌락이 짧은 순간인지 아는 이에게, 그것이 어떤 요리이건 부럽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침과 위산으로 녹여낸 물컹한 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단지 현존한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세상은 너무도 많은 것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광고와 마케팅의 시대입니다. 과거와 달리, 이제 이데올로기 전쟁도 광고와 마케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광고와 마케팅은 사실에만 기반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사람들의 욕망에 근거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마케팅 전략이 수립되고 광고가 디자인됩니다.
이런 광고와 마케팅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매체를 통해, 기사를 통해, SNS를 통해 끊임없이 어지럽힙니다. '이것을 사야 해', '이 후보가 당선되어야 해', '이런 정책이 필요해'... 수많은 선호와 기호들이 당위를 가지게 됩니다. 전혀 필요에 기반하지 않은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당위는 행동을 야기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두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존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욕망과 불안으로 요동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욕망과 그것이 좌절될까 하는 불안으로 요동칩니다.
하지만 애초에 누가 우리에게 이러한 욕망을 제시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던 순간이 있습니다. 무언가가 우리의 마음을 헤짚어놓았고, 그 결과 우리는 그것을 욕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것들을 욕망하지 않던 순간을 꺼내어 바라보면 됩니다.
불행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행위의 동기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동기는 당위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의 당위는 욕망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욕망은 대부분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입니다. 그것들을 내려놓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욕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크지도 않습니다.
다시 불운과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불운은 세상이 저희에게 가져다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외재적이어서 우리로서는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카르마, 사필귀정, 윤회, 어떠한 단어를 갖다 붙이더라도, 우리로서는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독교 식으로 표현하면 '신의 뜻'입니다. 신의 뜻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존재한다면, 분명 전능한 존재일 것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은 매우 내재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다루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므로, 그것을 만끽할 수도 있고, 그것을 흘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행을 만끽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너무도 큰 불운을 맞닥뜨렸을 때, 불행을 억지로 흘려보내려 하면 우리의 마음이 오히려 더 망가져버릴 수 있습니다. 너무 큰 감정은 차근차근 흘려보내면 그만입니다.
물길을 내어주면 불행은 조금씩 흘러나갑니다. 그렇게 흘려보내면 어느 순간 마음에 남아있는 불행이 사라집니다. 이제 그 곳은 빈 공간입니다. 그곳에 채우고 싶은 것을 가져다 놓으면 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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