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tom P Jun 09. 2024

부정적인 감정은 감정일 뿐

너도 내가 아껴줄게.

 우울증 진단을 받고서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울증 이 놈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 이후 양극성장애 진단을 받고서도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놈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1년이 넘는 '치료'는 큰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의사가 내 부하직원이었다면 크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의사였다면, 흠씬 혼난 뒤, 씩씩대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겠죠.


그냥 받아들이면 끝날 것을


 우울함을 비롯한 모든 감정들에는 꼬리표가 달려있습니다. 이 꼬리표에는 '부정적이다'와 '긍정적이다'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부정적이다' 도장이 찍힌 감정들은 미움을 받습니다. 그 감정을 느끼고 있노라면, 주변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 "오늘 상태가 안 좋아 보여"라면서 걱정 어린 말을 합니다. 그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나 자신조차 "내가 많이 힘든가?", "이 감정을 어서 처리해야 상태가 좋아지겠지"합니다.


 감정을 밀어내려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잘못된 방향의 노력임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부정적이다' 꼬리표를 달고 있는 모든 감정들을 쓰레기통으로 처박으려 합니다. 마음속에 배트맨이 살고 있었다면 그런 나의 죄를 벌하려 나타났을 것입니다. "왜 감정을 그토록 괴롭히지? 나의 주먹을 받아라!"




 우울하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부정적이다' 감정들은 나의 일상에 지장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이 깨달음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감정도 일상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웁니다. '부정적이다' 감정이 올라올 때 웁니다. 아기는 때때로 웃습니다. '긍정적이다' 감정이 올라올 때 웃습니다. 이렇게 아기에게는 떠오르는 감정이 일상입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공부가, 일이, 사회생활이, 연애생활이, 부부생활이, 자녀교육이 일상이 됩니다. 그렇게 차츰 감정도 일상이라는 사실을 잊어갑니다. 바쁜 일이 생기면 중요하지 않은 일을 제쳐두듯이, 감정은 늘 뒷전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면, 감정은 더 이상 일상에 자리하지 못합니다. 어딘가에 숨겨두거나 가두어둬야 할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감정은 마음에 떠오르는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감정은 기쁨부터 우울까지 다양한 빛을 내는 보석입니다.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현재 떠오른 감정이 우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의 일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억지로 숨기거나 가두려 하면, 그것은 그곳에서 점점 자라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 있을 만큼 자라났을 때, 더 이상 우리는 그것을 숨길 수도 가둘 수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우울하구나.'


 이렇게 우울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사람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품어주면 됩니다. 그러면 우울함은 다시 점점 작아져, 일상에 녹아들 것입니다. 그 우울은 이제 일상입니다. 굳이 밀어내려고 애쓰지만 않으면 그것은 그토록 커지지 않을 것입니다.




 감정을 미루고 억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감정에 끊임없이 물을 주고 먹이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울에 끊임없이 비관적 사고나 자기 비하적 사고를 먹여주면, 우울은 신이 나서 우리 일상을 뒤흔들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 쇄약 해져 가고, 우울은 그 틈을 타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몸까지 지배하려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정신과 몸 전체가 우울의 지배 하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아, 너무 늦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각은 다시 우울의 먹이가 되어, 우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더 어렵게 만듭니다.


 하지만 늦은 때는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 걸음 뒤로 떨어질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울에 잠식당한 나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 나를 바라보면, 나라는 것은 하나의 정신과 몸의 덩어리이고, 그것 위에 군림하고 있는 우울의 크기가 생각보다 크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감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울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다시 너를 품어줄 테니 내 안으로 돌아오렴.


 우울은 원래 내 안에 있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처럼, 내 마음에 떠오르는 여러 감정 중 하나였습니다. 이따금 피어났다가 다시 지는 꽃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이라는 꽃에 집착하여 너무 많은 물과 너무 많은 양분을 주었습니다.


  꽃이었다면 시들어 죽었겠지만, 감정은 다릅니다. 물을 부으면 부을수록, 양분을 주면 줄수록 무한히 자라나 결국 주인의 자리를 찬탈합니다. 하지만 감정이 바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주인이 자신을 품어주기만 하면, 적당한 물과 양분만을 주면, 그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감정은 자신이 쥐고 있던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울에게 물과 양분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울을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품어줍니다. 나를 지배하려 하면 나를 내맡기고, 내게 의지하려 하면 의지가 되어줍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우울은 다시 다른 마음들과 같은 꽃 한 송이가 되어 내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것을 짓밟으려 해서는 안되고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됩니다. 모든 마음이 그러하듯, 부정적인 마음도 그저 꽃 한 송이에 불과합니다. 내 마음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에 불과합니다.



이전 03화 불운해서 불행한 자의 정신승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