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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수 Oct 13. 2022

또다른 삶

파릇한 생기로 겨우내 움추림에 생동감을 주고 녹음으로 풍요를 주며 질릴만하면 화려한 변화로 감탄을 주고 마지막엔 땅에 내려와 대지를 덮어 발길을 포근하게 한다. 그리고 차가운 백색 가루을 맞으며 대지를 보호하고 스러져간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붉게 물들어가는 납엽들이 눈가에 스치며 지나간다. 

오색이 아닌 오십 색으로도 그들의 몸짓을 표현 못하리라. 잎의 마지막이 이토록 시리도록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인간의 마지막도 이렇게 멋질 수 있다면 나는 여러 번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 멋진 스러짐 뒤에 이어지는 생동을 기대할 것이다. 천년 만 년 스러지지 않고 낙엽처럼 찬란한 새로움을 기대할 것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신의 섭리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기에.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가? 아니면 무(無) 속으로 들어가는가?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 그것을 무(無)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뇌사상태처럼, 아니면 마취를 해서 의식이 없는 상태처럼?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은 후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이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 물에 빠지면 살기위해 발버둥을 친다. 

죽음을 극복하면 대단히 용감해질 것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죽음 앞에 초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나름대로 그럴듯한 논리로 확신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기 합리화에 빠지기 쉽다. 

용기가 아닌 만용이 되기 쉽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증거자가 있다. 죽었다가 살아나서 직접 증거를 보여 준 단 한 사람. 

제자들은 한순간에 그들의 직업과 소유를 버리고 3년 동안 그를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수많은 기적들을 옆에서 지켜봤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앉은뱅이가 그의 명령에 의해 갑자기 걷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소경이 눈에 침바른 흙을 바르고 강에 가서 씻자 눈이 떠지는 기적을 보았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하나를 가지고 5,000명분의 음식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자 모두들 겁이 나서 각자의 집에 돌아가서 그를 따라다니기 전 원래 하던 대로 살았다. 

그들은 스승과 같이 믿음을 위해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그들의 용기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생업을 다시 이어가는 중에 간간이 모여서 기도하고 서로 연락을 했지만, 감히 나서서 권위에 대항을 하거나 기득권의 잘못된 종교의식에 대해서 비판하지 못했다. 그들은 두려웠다.

  

그러나 한 사건 때문에 그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죽음을 더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기꺼이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죽어서 다시 태어남, 즉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도 그렇게 될 것을 100%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예수의 시체를 동굴에 보관하고 큰 돌로 막고 나서 그래도 혹시 시체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 군인들이 지키게 했다. 

제자들이 시체를 숨기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예전에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의 몸에 장사를 지내기 위해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가다가 갑자기 일어난 지진을 만나게 된다. 지진에 의해 동굴을 지키던 군인들이 잠시 기절하고 무덤을 막았던 돌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가 보지만 예수의 시체는 없고 갑자기 나타난 천사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광채가 나는 천사들의 말에 놀라서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뛰어가다가 마침 처음으로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난다. 그 여인들은 기쁘고 놀라며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곧바로 제자들에게 알리지만 오히려 제자들이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한편,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이 기절했다가 깨어나서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뛰어가 예수를 사형시키는 것을 주도한 대제사장에게 보고하자 대제사장은 예수의 제자들이 군인들을 매수해서 시체를 빼돌렸다고 소문을 내도록 한다. 군중들의 지지를 받던 예수를 죽인 그들은 군중들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던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또 제자 중 의심을 하는 도마에게는 직접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인해 구멍 난 손을 만져보라고 한다. 그리고 제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잊고 다시 생업을 이어가고 있던 베드로에게도 나타난다. 이후에 감람산에서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자신이 부활한 것의 증인이 되라고 하고 모든 나라에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분명한 소명을 준다.

나중에 사도 바울에게도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서 그를 회심시킨다.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앞서서 핍박한 사람이었으나 부활한 예수를 체험하고 오히려 앞서서 예수를 증거하게 된다. 

그리고 500명의 사람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 의해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을 것이다. 몇십 명도 아닌 500명 이상의 목격자들은 자신들의 가족, 친지, 친구, 동네 사람들에게 그 놀라운 소식을 알렸을 것이다. 500명이 5,000명이 되고 다시 50,000명이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람인 예수의 부활 소식은 큰 뉴스였을 것이다. 

그 목격자들이 최소 평균 10년 이상은 더 살면서 계속해서 그 사실을 증거하고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가 죽기 전에 그들에게 자신이 죽고 3일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언을 한 것을 상기한다. 

그들은 비로소 죽음은 끝이 아니며 새로운 시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가 준 소명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죽을 수 없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예수를 팔아넘긴 1명의 제자와 예수의 부탁으로 모친인 마리아를 모신 요한을 제외한 10명의 제자가 모두 목숨보다 더 소중한 그 소명을 완수하다가 순교한다. 

바울도 2년간 약 2,000km를 다니며 매를 맞기도 하고 배가 폭풍우를 만나 파선되기도 하며 생사를 넘나들며 그 소명을 다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한다. 

그들의 선교 여정에 의해서 기독교는 이웃 나라에 퍼지고 온 유럽을 덮게 된다.

  

부활이 있는 종교는 상위(上位)종교 중에 기독교가 유일하다. 

부활 사건이 지금의 기독교를 만들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는 그냥 세계 4대 성인(聖人) 중의 3명인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와 동일하게 한 명의 우러러볼 만한 위대한 사람으로만 기록되었을 것이고 인간의 구원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      

부활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스스로 한번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 

어찌 보면 그렇게 해야만 하지 않을까? 새로운 삶이 있다는데,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끄덕이거나 무시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부활 스토리는 제자들이 각자 쓴 성경에 나와 있다.

제자들을 포함한 부활을 목격한 많은 증인들 중에 어느 한 명이라도 달리 말했다면 그 소문은 거짓 소문으로 퍼지다가 소멸되었을 것이다. 부활 사건을 거짓으로 퍼뜨리기 위해 그들 모두가 입을 맞추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부활을 핵심 교리로 하는 성경은 그저 좋은 내용이 많지만 황당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는 책으로서 사라졌을 것이다. 

제자들의 행동의 변화, 특히 목숨을 건 희생은 목숨을 걸 만큼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것은 충분히 부활의 진실성을 설명해준다.      


부활을 인정하면 유일하게 다시 태어난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신의 아들이고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서 33년을 살고 3년 동안 12 제자들을 가르치고 세상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전파하였다.

신은 왜 자신의 아들을 굳이 이땅에 보내어 온갖 고초를 겪고 죽게 했을까? 

그만큼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킨 그 사랑을 인간에게 보여주어 우리 인간도 동일하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 사랑에 의해 인류는 태생적 이기심과 아집, 시기, 분노 등에도 불구하고 멸절되지 않고 지금까지 이렇게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다. 우리에게 있는 근본적 악(惡)은 은혜로 주어진  선(善)에 의해서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을 인정하게 되면 죽음 자체는 사실 그리 큰 이슈는 아닐 것이다. 제2의 인생이 있다는데, 오히려 그 새 삶이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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