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태승, <뽕>이 장난아니다.
이길태승 대략의 이력서다. 가능한 한, 年(년)도 순으로 소개한다. 1962년, 인천에서 (부)이우창 그리고 (모)길운월의 3남 3녀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축현초, 광성중, 인하사대부고를 졸업한 후, 1981년 단국대학교 법정계열에 입학했다. 입학성적우수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한 학년만 다녔다.
학업을 지속하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는 (계속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지 못한 내 문제가 가장 크다. 그래도 핑계를 댄다면) 점심 라면 먹을 비용은커녕 교통비조차 없어서 학교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는 거다. 나름 고등학교 때는 전교 1등도 몇 번 해봤던, 우스운 성적이 아닌, 우수한 성적을 거뒀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똥 푸던 <똥 이야기> 글에서 묻어나는 ‘돈’에 대한 절박감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端初(단초)가 될 수 있다.
1982년은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다. 기차 레일 위를 가로지르는 枕木(침목) 만드는 동양목재소, 리어카 책 장사, 초등학생 과외, 공사장 잡역부 등이 그거다. 1983년부터 1988년 2월까지는 가가호호 방문하는 서적 외판원을 했다. 그 사이, 1986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1990년 2월에 5학년으로 졸업했다. 당시는 동 대학이 5년제였다.
1988년 3월 2일부터 2003년 말까지 서울과 인천에 있는 속셈학원과 보습학원 그리고 입시학원에서 강사로, 강사이자 원장으로 근무했다. 수학을 가르쳤다. 이게 학원 경력의 전부다.
2005년 한 해는 뜻한 바 있어, 신학대학원 입학 준비를 위해 공부에 전념했다. 성경과 영어, 철학과 논술 그리고 면접이 시험과목이었다. 그다음 해(2006년)에 용인에 있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M. div)과정에 입학했다. 경쟁률이 약 4.5:1이었다. 지금은 그만큼 안 된다. 많이 하락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2006년 3월에 입학하여, 2009년 2월에 졸업했다. 교회 전도사, 강도사를 거쳐 2010년 가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역 교회에서 사역한 후, 내 가족 구성원을 중심으로 ‘신행일치열매교회’를 개척했다. 지금에 이른다.
참고로 말한다. 軍(군) 면제다. 공식적으로 첫 고백이다. 5살 때다. 소아마비 걸렸다. 오른쪽 다리가 약 2cm 짧다. 지금도 전체적으로 몸이 좌우가 비대칭이다. 상대방에게 특별히 알리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한다. 아무리 오래 걸어도 걷는 데엔 전혀 지장 없다. 다만 뛰는 데엔 지장이 있다. 모습도 그렇고, 속도도 그렇다. 그래도 잘 뛸 때(중학교 3학년 체력장)는 100m를 15~16초로 뛰었다.
군 입영 신체검사로 병무청에 갔을 때다. 병원에서 받은 소견서를 제출했다. 검사 담당자가, 한번 걸어보라고 하면서, ‘방위로 근무하라.’는 결정을 하려 했다. 다급하게 집안의 경제적 사정을 토로했다. 방위병으로 근무할 수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만큼 약하게 걸린 거다. 공식적인 장애 등급은 받지 못했다. 받지 않으려 한 게 아니다. 안 된단다.
소아마비와 관련하여 말한다. 많은 사람이 의외로 잘 모르고 있다. 소아마비가 전염병이란 걸. 현재의 ‘코로나 19’처럼, 소아마비도 전염병이다. 세계적으로 유행을 겪는다. 나와 같은 해(1962년)에 태어난 사람이, 다른 해에 태어난 사람에 비해 비교적 소아마비에 걸린 사람이 많다. 통계적으로도 의미 있게 나온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소아마비 전염병이 2020년에 아프리카에서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음을 확인/발표했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이젠 소아마비(폴리오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종식된 전염병이다. 이 전염병에 걸렸던 당사자로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할 게 더 있다. 2009년 3월, 평생교육진흥원 학점은행제 행정학사(사회복지학 전공) 3학년으로 편입하여 2011년 2월에 이수/졸업했다. 졸업한 당해 년에 <제9회 사회복지사 1급 국가시험>에 응시했다. 총 8과목, 총 240 문제 중, 과락 없이 60%(144문제)를 맞혀야 합격한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143문제를 맞혔다. 한 문제 차이였다.
대학원까지 졸업하면서 그동안 많은 지필고사시험을 경험했다. 학원에서 내가 직접 수학 문제 낸 것까지 포함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근데, 국가시험을 이렇게 내다니. 국가시험 제도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무리 빨리 문제와 지문을 읽어도, 도저히 제한된 시험 시간 안에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냥 ‘막 찍어야 할 판’이었다. 불합격에 대한 단순한 핑계가 아님은 그동안 있었던 합격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년 편차가 심하지만, 평균 45% 합격률이, 9회 시험은 14.36%였다. 국가시험 통계니,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다.
시험 문제도 공개되지 않았다. 전국의 수험생들이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 시험을 주도한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때다. 공분을 참을 수 없었던, 송창식의 노래 ‘담배 가게 아가씨’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정의의 사도가 나섰다. ‘다다닫다다닫다다닫---, 하늘이 노랗’지는 않았다. 바로 나, 이길태승이다. 이름을 보니, 뭔가 다툼에서 이길 거 같다. 질태승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오프라인에서도 만났다. 그동안 인터넷에서 <제9회 사회복지사1급 국가시험>이 부당한 시험임을 나름 논리적으로 주장했던 내가, 전국 수험생 약 3만 명의 대표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대표 증서’는 없었다. 한국사회복지사협회 방문, 보건복지부 앞에서의 1인 시위, 한국산업인력공단 항의 방문, 관련 부처 국회의원 방문 등 최선을 다해 부당함을 호소했다. ‘시험 문제 공개’ 행정심판청구와 그리고 ‘불합격취소소송’도 병행했다.
정말 길다. 울분이 되살아나서 그렇다. 투쟁에 대한 결론이다. ‘시험 문제 공개’ 행정심판에선 이겼다. 법령이 바뀌었다. ‘불합격취소소송’은 패소했다. 그때부터 <사회복지사 국가시험> 문제가 공개됐다. ‘나의 투쟁기’(?)는 유튜브(28분 13초 분량)와 다른 포털에서, <사회복지사 이태승> 검색하면 동영상을 포함한 그 일부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매우 잘생긴 얼굴과 함께.
아들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것과 맞물려, 혹 이후에 아들과 함께 일을 도모할 생각으로 시작된 나의 ‘사회복지사’ 도전은 이렇게 마감됐을까 아닐까. 마감 아니다. 아들이 졸업하여, 처음 시험 치르는 <2016년 제14회 사회복지사1급 국가시험>에 함께 응시, 동반 합격했다. 그동안은 기분도 나쁘고, 필요도 없어서 아예 시험 자체에 응시하지 않았었다.
중간 광고다. 사회복지사1급 국가시험에 처음 응시했던 그해(2011년), 청소년상담사3급 국가시험과 그리고 직업상담사2급 국가시험에 응시했다. 둘 다 합격했다. 다만, 청소년상담사3급은 연수과정이 필요한데, 아직 연수를 받지 않았다. 언제든지 신청해서 받으면 된다. 대단한 이길태승이다. 이길태승, <뽕>이 장난 아니다. 추앙까지는 사양한다. 정말 귀엽다. 재롱 부린다. 웃기는 짬뽕이다.
끝이 아니다. 이것저것 다 자랑질이다.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원우회장 입후보/선거/당선/역임했다. 초, 중, 고, 대학교 모두를 거론해도 줄반장도 못 했으면서(오락부장은 거의 도맡아 했다), 대학원 약 천 팔백 명의 대표가 된 거다. 2007년도의 일이다. 원우회장으로서 역할과 활동은 거론하지 않겠다. 자칫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력 중, 학력과 경력을 중심으로 말했다. 마지막이다. 말하기 살짝 곤란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나름 예민한 부분이다. 그래도 말하는 게 좋을 듯하다. 어차피 ‘솔직하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묻기 때문이기도 하다. ‘뭐 먹고 사냐? 뭐해서 돈을 버냐?’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라고 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대답한다. 밥 먹고 살고, 쌀은 돈 갖고 사고, 밥은 쌀 갖고 만든다. 가끔 밥(햇반)을 살 때도 있고, 밖에서 밥을 사 먹을 때도 있다. 정말 미안하다. 2002년 12월, 부천에 조그만 복합 상가 일부를 분양받았다. 임대료를 받아 딱 알맞은 규모로 생활한다.
“내가 두 가지를 여호와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이루어 주소서. 곧 허황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가난도 부함도 허락하지 마시고, 오직 일용할 양식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배불러서 ‘여호와께서 누구인가?’ 하고 당신을 부인할까 두렵습니다. 아니면 내가 가난하여져서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할까 두렵습니다.” (잠언 30장 7절~9절)<쉬운 성경>
부족하지도 않고, 풍족하지도 않게, 스스로 만족하며 감사하게 여기며 산다. 이렇게 이길태승은 잘 먹고 잘산다. 모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덕분이다. 진심이다. 아멘(진실로 그러하다)!
자랑할 게 더 생겼다. 2022년 8월 17일,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첫 도전이었다. 매우 기쁘다. 감사하다.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글을 꾸준히 쓸 계획이다. 공감하는 삶을 먼저 살아야 할 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