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이 만든 효자.
사람들이 일상에서 보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날씨일 거다. 덥거나 춥거나, 맑거나 흐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아니거나, 눈 또는 비가 오거나 그러지 않거나 등등. 날씨는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옷차림부터 기분 또는 영업/사업 등 경제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지구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 생명체부터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닥친 심각한 기후위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2022년 5월 30일, 친구 엄광0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관람했다. ‘20세기 초중반 한국 근현대 작품 중에서 50여 점의 대표작’이 전시됐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 영향인지 사람들로 붐볐다. 2시간 정도 줄 서서 기다린 후 입장, 약 1시간 동안 감상했다. 전시 공간보다 관람 인원이 많아서일까,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만일, 사람들이 적어서 또는 공간이 넓었다면 제대로 감상(?)했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더라도 제대로 감상할 실력(?)이 있긴 있었나?!
전날 인터넷을 통해 <이건희 컬렉션>의 전시 작품에 관해, 전시 큐레이터로부터 설명을 미리 들었다. 그런데도 작품에 관해 잘 알 수 없었다. 작가의 의도부터 시작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다. 실제 작품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도.
정확히 밝힌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무식한 분야로 지금도 미술을 첫손에 꼽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 시간이 가장 싫었다. 크레용도 물감도 도화지도 색종이도 찰흙도 그 어떤 것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었다.
설마 당시 선생님께서 준비물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야단을 치셨겠느냐 마는. 그 영향만으로 미술이 싫어졌겠느냐 마는. 어찌 됐든 미술에 소질이 없었던 탓인지, 미술(회화, 조각 등 모든 방면에 있어서) 분야에는 한 마디로 ‘모르겠다’이다. 어떤 영향을 받아서 이 정도로 미술에 무식하게 됐는지? 미술에 관한 글이 ‘?’로 뒤덮인 까닭이다.
초등학교 4학년(1972년)부터 구월동 모래마을에서 생활했다. 당시, 대부분 빈궁한 삶이었다. 모래마을 주민들은 더 가난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수가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매일매일 장사했다. 하지 않은 장사가 없을 정도다. 사시사철, 물건을 바꿔가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팔 물건이 가득한 무거운 ‘다라이’(대야도 함지박도 아니다. 다라이다)를 머리에 이고서. 그 힘듦을 어떻게 형언할 수 있을까! (엄마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언젠간 할 수 있을까?!)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다. 방학 때는 틈만 나면, 동네 친구들과 함께, 어른이 계시지 않은 집에 모여 화투를 했다. 돈 따먹기를. 10원, 20원--- 많아 봤자 판돈 전체가 일이천 원이었지만. 놀음이 아니었다. 분명한 노름이었다. 당시의 팽팽했던 공기 흐름을, 지금도 기억할 정도로. ‘눈보다 빠른 손’은 아니었지만.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네 집에서 화투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녁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나를 엄마가 찾아왔다. 장사를 다 마치고선. “태승아, 거기 있니?!” 아! 하늘이 노랗다. 엄마에게 들켰다. 엄마는 우리를 먹여 살리려, 그렇게 힘들게 장사하고 오셨는데, 나는 노름에 열중하고 있었던 거다. 그때의 심정이란! 엄마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아주 많이.
엄마는 날 혼내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말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 후, (과장하여 표현하면) 인생관이 바뀌었다. <어떤 것을 할지 말지 고민할 때, 엄마가 좋아할 만한 일이면 하고, 싫어할 만한 일이면 하지 말고!> (마마보이 나셨나?!) 좀 철이 들기 시작한 계기다.
삶의 기준이 생겼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니 후로도, 엄마가 별세하신 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쭉~. “나의 나 된 것은”, “팔 할이”, 엄마 영향이다.
가수 조영남은 화투 그림으로 화가(?)로 대박 났다.
인간 이태승은 화투 노름으로 효자(?)로 다시 났다.
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