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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아름 May 18. 2023

행복은 선택과목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었다. 

세상에는 공짜도 없지만 손해 나는 일도 그리 없다. 따지고 보면 말이다. 

생각하기 따라서 얻고 또 얻는 것이 삶은 아닌가 싶다. 잃고 얻고 또 잃고 얻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옹이가 되어가는 나무처럼 인생은 상처든 영광이든 결국 내재되어 자신의 삶으로 응축된다. 골골이 거칠게 때론 곱게 새겨진 주름처럼 말이다. 그래서 난 언제나 인생은 이문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술술 풀릴 때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다가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각종 고통에 신음하기도 하고, 오만가지 원망을 할 때도 있다.  

잘되는 것만이 진정한 축복일까? 

그것만이 진정한 행복일까?


나는 그렇게 믿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99퍼센트 잘 가다가 마지막 지점에서 일이 확 틀어질 때도 많았고, 승리를 확신한 순간에 주저앉은 적도 더러 있었다. 참담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뜯으며 원인을 찾기 위해 깊이깊이 굴을 파고 들어앉았던 적도 참 많았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하늘을 날듯이 좋았던 때는 인생의 1할 정도, 3할은 극적인 고통과 몸부림의 날이었고, 6할은 그저 먹구름과 햇빛이 교차하는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하기를 선택했다. 


다만, 그 행복이 언제나 핑크빛 기쁨 찬란한 아우라로 가득 찬 것은 결코 절대 아니었다.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꼭 감사할 것도 아니었다. 인생사 전화위복, 새옹지마라 하지 않던가. 그와같이 그러했다. 


스스로를 볼 때 삶을 살아가는 지능과 근육은 약하지만, 학문에 대한 머리는 타고났는지 난 고등학교 졸업까지 전국 1% 이내에 드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몇몇 과목은 손가락 안에 드는 소위 수재였다. 남성중심적이고 권위적이셨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던 내가 아버지 품을 떠나 S대를 간다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입시를 앞두고서야 알았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청소년기의 삶이 모두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삶이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일찌감치 알았다. 


나의 노력의 대가를 내가 반드시 거두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했다. 대신, 인생이 학문만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새기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물론, S대 출신이 아니어서 받았던 사회적 불이익도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사회의 제도권 현실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권이 영원하지는 않았다. 사회의 시스템에 만들어놓은 제도권은 정년까지다. 이후에는 룰체인지가 있다. 


내 앞길을 막은 아버지에게 감사보다는 원망의 마음이 더 컸지만 인생의 길이라는 것이 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니 어찌하랴. 주어진 뇌와 재능을 가지고 인생을 또 개척해 나갔다. 길이 꺾인다고 못 갈 것도 아니었다. 없으면 내가 길을 내면 되었고, 그렇게 인생은 도전해 가는 대로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입이 보살이고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하는 대로 믿는 대로 인생은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작년 연말과 올해 초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토니로빈스, 밥프록터  같은 자기 계발 멘토들의 책을 읽었다. 이들의 능력이 탁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위대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생각이 마음대로 떠다니게 하지 않도록 매일 자신의 생각을 희망과 믿음의 나무에 꽉 붙들어 매고 오로지 한 길로 갔다. 그리고 매일매일 바라고 원하는 형상을 섬세하게 빚어갔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믿고 행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무한한 잠재능력의 바다에서 각종 진귀한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고선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 본 길을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결론은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예수님도 풍랑이 치는 바다를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라고 꾸짖으시며 파도를 잔잔케 하셨다. 아무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절대적이지 않았겠는가. 좋은 일이 있다가도 어려움이 닥치면 어느새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고 소위 ‘오두방정 난리 부루스’를 떨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다. 


비가 오면 구름 위를 높이 올라 유유히 나는 독수리처럼, 비바람 고통의 구름 위에 여전히 찬란히 빛나고 있는 태양을 보고 싶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은 심안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결국 그 믿음은 실재가 된다. 


앞날을 모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도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많은 것이 인생이다. 절대자에 대한 믿음도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의 매무새를 살펴본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선택이라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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