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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아름 May 15. 2023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나를 알아간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타일에 죽고 스타일에 살았던 나는 40대가 넘어서자 맨얼굴에 면바지 그리고 운동화, 점퍼를 일상복으로 입었다. 30대를 다 채우는 날까지만 해도 슈트에 스틸레토 힐을 즐겨 신던 나에겐 조깅화 외엔 외출용 운동화 하나가 없었다. 


지금 옷장에는 슈트 대신 물세탁만으로도 충분한 옷들이 전면을 차지하고 있고, 신발장엔 다양한 종류의 운동화들이 가득하다. 40대 후반의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다. 편한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뭔지 모를 수북이 쌓인 먼지 같은 애매한 답답함들이 생각의 시야를 흐린다. 수년동안 입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할 거면서 공간만 차지하는  ‘비싼 쓰레기’들이 눈치 없는 내게 매일 보내는 무언의 경고 같았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체력이 떨어지니 회사를 다니는 것이 갈수록 피곤해진다. 물론 수도권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삶에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눈을 뜨면 출근하기 바쁘고, 퇴근하면 주섬주섬 집안일을 해놓고 쉬기 바쁘다. 그런 내 모습을 나는 요즘 '새롭게, 그러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입지 않는 수많은 옷들이 몇 년째 그대로 걸려있기만 하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그저 생활인이지 내가 아니었다. 어쩌다 내가 이리되었나. 자기 관리가 부족한 탓도 있을 테고, 삶이 고단하니 미처 나 자신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있으리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저 나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또는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를 어떻게든 끌고 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나에게 최고의 것을 누리도록 하는 돌봄 말이다. 그동안 나 자신을 오래도록 방치했었나 보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는 사이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보면 대단한 족적이나 과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살과 주름이 좀 더 늘고, 반면 삶에 대한 깊이는 진실로 농밀해졌다. 


낙엽들을 보면 사실 어떤 종류의 나무인지는 구분이 돼도, 푸르렀을 때의 모습을 바로 알아보긴 힘들다. 내 삶의 모토였다. 늙으면 젊은 날의 미도 모두 사라지니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미에만 치중할 필요 없이 내실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난 한쪽으로만 너무 치우쳤었다. 인정한다. 


내면의 모습에 정말 올인하듯 살아왔던 젊은 날이다. 겉보기엔 활달하며 털털하지만 내면으론 소심함과 낯가림이 심한 나는 결벽증 환자처럼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했다 치면 며칠이고 혼자 굴을 파며 괴로워했다. 자책감이 심한 탓에 나 자신에게 너무 심하게 조각칼을 들이대었다. 남이 무엇이라고 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나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나는 언제나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내 모습을 평가받고 확인받기를 원했다.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양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러한 양심의 소리들에 나는 괴로워했고, 귀를 닫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나의 젊은 시절이었다. 종교인도 아닌데 심하리만큼 나 자신을 옭아매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이제야 비로소  하게 된다. 


40대 후반, 인생의 절반을 산 지금 나를 마주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조차도 많은 노력과 연습이 필요한 것이구나...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먹이고 보이며 난 오늘 아침 출근을 했다. 클래식하면서도 경쾌한 재즈음악과 함께 도로 사이로 쫙 펼쳐진 사과밭을 달린다. 나 자신에게 다시  약속을 한다.


‘이제부턴 너도 사랑할게. 네가 나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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