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조이는 듯한 갑갑하고 폐쇄적인 문화에서 성장한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집에서 튈 기회만을 노렸다. 거창한 목표나 치밀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유가 그리웠다.
직장에서 만나 절친이 된 그녀로 인해 나는 캐나다로 야반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스물 후반에 한국에 돌아온 나는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2003년 2월경이다. 지인의 추천으로 도시에서 떨어진 시골 흑두부집 식당에 그녀와 함께 늦은 점심을 하러 갔다. 그래도 오후 5시경인데 두부집은 적막했고, 군데군데 육중한 소나무기둥으로 지은 한옥덕택인지 눌러내리는 위압감까지 들었다.
“오늘은 예약이 차서 손님 안 받아요”
“아, 맛있다고 해서 왔는데 점심을 못 먹어서요. 식사만 얼른 하고 나갈게요”
주인장은 시계를 보더니 종업원에게 눈치를 주곤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검은 양복에 배지를 단 한 무리가 들어왔고, 수행비서 같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 누구지?‘ 구석에서 그들을 빤히 쳐다보는 우리를 보는 그들의 화살 같은 시선이 꽂힌다. 눈치 빠른 종업원이 국회의원 아무개 아무개라고 속사포로 말해주고 가는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지 싶었다.. 긴 세월은 아니지만 한국을 몇 년간 떠나 있었던 데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반응 없는 우리가 이상했을 것이다. 모두들 못 만나서 안달인데...’ 어디 가서 한 무리의 의원님들을 만나랴 ‘하는 심사였던 것이다. 식당에는 여의도 그분들과 이방인 우리 둘 뿐이었다. 지역구와 표심 확보에 진심인 그분들은 서비스로 흑두부 김치를 보내주었다. 나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는 날이기도 어쩌면 기회의 때이기도 했다. 비록 먼 훗날에 안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故 노무현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의원들이었고, 그중에는 故 김근태 의원도 자리에 있었다.
두부집 주인장은 식당을 소개한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씨! 여자 국회의원 밑에서 일을 배워보는 게 어때요? 김의원 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매서운데 ○○씨를 언급하시네요”
서 너번 오퍼는 이어졌지만, 생소한 제안이기도 했고 여의도에 가면 사람 버린다는 편견이 강했던 나는 그들이 무서웠다. 이후 흑두부집에서 보았던 그 비서실장이 나이트클럽 몰카사건에 연루되어 사직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두부집 사장은 알고 보니 그의 친동생이었다. 주변에서 본 사람의 일이 뉴스에 나오다니 신기하면서도 왠지 모를 씁쓸함도 덤으로 따라왔다.
대통령의 제1부속실 비서실장이니 그 파워가 얼마나 컸을 것이며, 동생이 식당을 운영했으니 거물들이라는 거물들은 다 올법한 것이 맞았다.
벌써 20년이 지난 이야기다. 내가 여의도에 입성했다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권력을 쥐고 있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권좌를 얻기 위해 더 굵은 줄을 찾아 힘을 구걸하고 있었을까? 세상의 불합리한 것을 보고 겪을 때마다 난 20여 년 전 그때를 생각해 본다.
소위, 힘의 구도에서 ’ 짬짜미‘로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되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생각이 깊어진다. ’ 양실장 몰카사건‘은 이후 여야정쟁을 통해 ’ 김검사 몰카사건‘으로 본말이 전도되었고, 현직검사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들의 뇌 블랙박스에 녹화된 당시 영상은 그들 외엔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다.
진정한 권력은 무엇일까? 권력 구도라는 시스템 내에서 룰을 정하는 사람은 강자다.
군주시대에는 ’ 짐이 곧 법이다 ‘ 하지 않았는가. 룰은 약자보호를 위해 만든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약자보호를 통한 강자의 이익실현 즉, ’ 일타쌍피‘다. 강자의 줄에 매달린 식솔들은 강자의 캔버스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룰을 꼬고 만들어 비튼다. 새로운 강자가 등극하면 룰이 다시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룰이 바뀐다.
김검사는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고자 했던 그 칼날이 용린을 건드린 듯하고, 수사의 방법 역시 온전치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제기한 의혹이 소설은 아니었지 않겠는가.
권력의 제도권 내에 들어오지 않으면 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 룰이 맞든 틀리든 중요하진 않는 것이 내가 살아본 사회의 현실이다. 절대적이며 완전무결한 룰은 없으니까 말이다.
살인을 해도 정당방위로 무혐의가 되기도 한다. 룰의 양면성이다.
인생의 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꿉장난할 때는 주먹이 센 꼬마가 룰을 만들고 땅을 따먹는다. 학교에 입학하면 부모의 사회적 서열이 룰이 되어 정순신변호사 아들 학폭 같은 비화가 탄생되기도 한다. 피해자는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몸서리치고, 가해자는 권력의 맛에 더욱 도취된다. 잠시간....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 줄을 잘 서는 자가 룰을 이용해 약자를 괴롭히고 탈취하기도 한다. 각종 음해와 공모로 룰을 비틀어 꼬아 선량한 법으로 범죄자 세탁을 한다. 겉으로는 능력중심의 인재기용이라고 하지만, 권력자에게 능력이란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어쩌면 사고하고 판단할 권리보다는 복종할 의무만이 주어진 듯 보인다. 그러한 제도권 속에서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신음한다. 나 역시 오랜 세월 보아왔고, 겪어왔던 일이기도 하다. 낙하산처럼 오고 가고 사람은 계속 바뀌고, 줄에 매인 식속들도 바뀐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더니만, 사람 일이 그렇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공통된 룰이 있다. 룰은 강자가 만드는 것이다. 강자는 계속 바뀐다.
정년이 되어 사회에 나오면 제도권 내의 룰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승진할 일도 없고, 줄을 설 일도 없다. 무리 속에 만들어진 그들만의 리그와 룰은 그 리그에서만 먹히는 룰일 뿐이다. 막막함으로 룰의 부당함에 분노하지만, 그마저도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왜? 그들만의 리그요 그들만의 룰이니까 말이다.
입안의 혀처럼 굴던 가신들이 주군으로 모셨던 자가 자리에서 내려오면 태도가 달라진다. 또 다른 주군을 찾아 누우처럼 대지를 헤맨다. 몇 년 묵혀두면 고수익을 낼 주식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말이다.
고위공무원으로 퇴직하신 선배님들은 한결같이 처음에는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당황해하신다. ’ 내가 누군데 말이야...‘ 그저 같은 아파트 같은 동네에 사는 아저씨일 뿐인데 말이다. 이마에 써붙이고 다녀도 그들이 속했던 제도권의 룰은 먹히지 않는다. 여전히 쓰레기는 종량제 봉투에 담아야 하고, 분리수거도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다.
인생의 해그늘에 접어들면 ’ 살아온 길, 인격, 양심‘이 룰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다 해가 꼴까닥하고 넘어가는 순간이 임박하면 이승 갈 준비에 하늘의 그분을 그제야 찾는다.
이제 그분이 다스리는 룰의 세계로 가야 하니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 룰이라는 것이 그렇게 매 순간 바뀌는 것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와 같은 룰은 언제나 존재한다. 양심처럼 말이다. 다만, 그 룰을 인생들이 마음껏 주무르는 것이 문제다. 권좌에 오른 자는 룰도 바꾸고 선수도 교체한다. 입맛에 맞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