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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Dec 18. 2018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되는대로 헤메며 살아가는 것 같은 내 삶도 어디론가 가고 있겠지

조향을 2년째 배우고 있다. 향을 좋아한 것은 아주 오래 되었는데, 직접 만들어보겠다고 마음 먹은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놓지 않고 있다. 끈기있게 뭔가에 오래 집중하는 힘이 부족한 나로써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드문 정도가 아니라 출근과 글쓰는 일을 제외하고 한가지를 이렇게 오래 지속한 적이 없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말이겠다.


처음에는 그저 근사해보여서 시작했다. 배우기 전에는 뭐랄까, 색을 조합해서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하리라 예측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장미 향하고 오렌지 향하고 시더우드 향을 섞으면 되는 거 아닌가? 향수 공방에서 향수 만들기 수업을 들어보신 분들은 이해할 것이다. 좋은 향 + 좋은 향 = 좋은 향수!?


하지만 인간의 예측이란 늘 그렇듯 빗나가기 마련인 것. 원데이 클래스에서 흔히 이뤄지는 향수 만들기 수업은 프로 조향사들이 일반인들도 쉽게 조합할 수 있게 만들어둔 안정적인 향을 섞어보는 정도의 단계다. 실제 조향은 몇백가지 되는 향료를 고르고 골라 0.01그램까지 세어가며 향을 조합해보는 ‘화학’에 가까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수십 수백번의 조합은 전부 실패로 돌아가고 오직 단 하나의 향만이 살아남는다.


공부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점점 출구가 없는 길로 들어서는 기분이었지만, 이미 흥미를 넘어 매혹된 상태였다. 내 머릿속에만 있고 세상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를 실존하게 만드는 그 과정이 굉장히 지루하고 고달팠지만 즐거웠다. 그 지점이 글쓰기와 아주 흡사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좀 더 전문적인 연구를 하고 싶어서 분당에 있는 ‘미센트’라는 아카데미에 매주 들락거리며 배우고 조향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 시작했던 곳은 ‘지엔’이라는, 한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아카데미였다. 장기 집중력이 약한 대신 한번 꽂히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는 내 성향 덕분에 나는 단기간에 기초반에서 직접 향수를 제작해 판매하는 코스까지 수강했다. 


그리하여 나의 첫 향수 [Feel Alright]이 텀블벅에서 펀딩되고 이틀만에 목표액을 넘어섰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아직 풋내기 조향사였기 때문에, 사실 그 향수는 지엔 퍼퓸의 정미순 원장님과 함께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3달 간 주말을 모두 반납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막판에는 퇴근 후에 밤 늦게까지 아뜰리에에 남았다.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초보 조향사가 판매될 향수를 혼자 완성할 수 있을리는 없을 터, 원장님께서 수시로 포뮬러(일종의 향 조합 레시피)를 수정해주시며 함께 고민해주셨기에 끝까지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계절을 보내면서 깨달은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의외의 깨달음은 내가 엄마 또래의 다른 여성분들과 깊게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맺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는 엄마처럼 정미순 원장님도 처음 조향 아카데미를 한국에 들여오고 향 관련 교육 사업을 쭉 해오고 계셨다. 이 사회에서 ‘일하는 5-60대 여성’이란 어떤 존재이고 이미지인지 자주 생각했다. 내가 꿈꾸는 미래 속의 나의 5-60대는 어떻지?



뭔가 비장한 이야기가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원장님과의 대화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이렇게 어른 중의 어른인 분도, 이렇게 많은 것을 이룬 분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구나! 대화하며 자주 놀랐던 기억이 있다. 원장님은 조향과 일에 대해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면서도, 때로는 “사실 나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몰라”하며 웃으셨다. 그 말을 들은 내 기분은 “5-60대에도 미래가 막막하다니ㅜㅜ”라기보다는 “삶과 일은 아무리 오래 지속한다 해도 익숙해지거나 모든 걸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구나”하는 안도 섞인 끄덕임에 가까웠다.


가장 공감했던 대화는 ‘인생 계획’에 대해서였다. 나는 계획 러버이지만 되도록 장기 계획은 세우지 않는 편인데, 한번도 지켜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OO 고시’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외심이 생긴다. 저렇게 긴 안목으로 침착하게 인생을 살아가다니…. 5년 계획, 3년 계획, 1년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욕심이 많아서 Too Much 계획을 세우고 그걸 못 지켰다고 자책하고 새로 계획을 짜고… 그걸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애정하는 이동진 평론가님의 블로그 대문글을 봤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아니,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완전 나한테 딱 맞는 인생 모토잖아! 


저 문장을 정미순 원장님께도 소개(?)해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원장님도 “어머, 완전 내 얘기같다”면서 웃으셨다. 네? 국내에 처음으로 조향 아카데미 시스템을 들여오신 분이요? 지금도 가장 오래된 조향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요? 전국에 수많은 지사를 가지고 계신 분이요!? 이렇게나 이룬 게 많은 분이요!!?? 원장님은 ‘몇년 안에 OO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OO을 하고 싶다’, ‘언젠가 OO이 되면 좋겠다’하고 꾸준히 바라며 살아오셨을 뿐이라고 하셨다. “뭔가 계획을 거창하게 세워도 잘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그런데 열심히 살다 돌아보면 이미 해낸 일들이 거기 있는거야.” 


그로부터 또 일년여 쯤 지났고,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여전히 조향을 하고 있다. 글쓰기와 조향을 동시에 하는 게 어떤 장점이 있어? 그 두가지를 가지고 앞으로 어떤 걸 이룰거야? 누군가 묻는다면 딱히 대단한 답을 내놓지 못할 것 같다. 다만 나의 두번째 책에는 어떤 이야기를 싣고 싶은지, 나의 두번째 향수에는 어떤 향을 담고 싶은지는 명확하게 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노력했고 내일도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이루는 걸음들 속에서, 되는대로 헤메며 살아가는 것 같은 내 삶도 어디론가 가고 있겠지.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무엇을 보게 될지 지금은 절대로 알 수 없고, 그래서 더 살아볼 재미가 있는 것 같다. 


Illust by 소보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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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instagram.com/ah.r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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