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혼자서 마주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를 받아들이는 자세’다
요즘, 나는 혼자 일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도 내가 정한다. 일과 일 사이에 운동을 하기도 하고, 미팅을 하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지켜야할 그 어떤 룰도 없다. 모든 것은 내가 정하고, 그걸 따르는 것 또한 오직 나 뿐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마냥 좋은 얘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자유라는 건 엄청나게 무거운 것. 자유를 사용하는 것도, 자유를 책임지는 것도 내 몫이다. 스물다섯에 입사해서 근 10년 간 회사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퇴사 직후에는 ’알아서 일하기’가 정말 큰 숙제로 느껴졌다.
그 무렵 내 일기장에 가장 자주 적힌 문장 중 하나는 “나 자신을 잘 운용해야한다”는 다짐이였다. 적어도 일하는 데 있어서는 내가 나의 사장이자 직원이었다. 하지만 이 놈의 말 안듣는 직원(=나)은 영 신통치가 않았다. 어떤 날은 갑자기 아프고, 어떤 날은 가족이나 친구와 다퉈서 계속 딴 생각만하고, 어떤 날은 이유없이 무기력하다며 침대 속에서 나오질 않고….
그럴 때마다 내가 도무지 마음에 안 들었다. 30대가 되어서도 ‘마음의 문제’ 가지고 앓는 소리를 할꺼야!? 혼자 일하는 데 이따위로 하면 망하지 않겠냐고!! 내 안의 사장이 나타나서 마구 화를 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서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무슨 대책이 필요했지만, 찾지 못한 채로 한참을 보냈다. 그러다 약속 시간에 이르게 도착한 덕에 둘러본 서점 에세이 코너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힌트를 얻게 되었다.
“훈육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아이에게 ‘나는 널 이해하고 있어. 너의 마음을 충분히 들어주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어’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떼를 쓰더라도, 우선은 아이를 진정시키거나 아이 스스로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엇 때문인지 물어본다. 시하 나이대의 아이는 떼를 쓰는 과정에서 자기 감정에 매몰되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잊어버리곤 한다고 전문가들이 얘기한다.”
봉태규씨의 에세이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의 한 단락이다. 아이의 ‘훈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에서 나 자신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는 것이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이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내 마음속의 아이를 발견했다. 그 아이는 앞서 칭했던 내 마음 속 ‘말 안 듣는 직원’과 동일 인물이었다.
내 마음속의 아이든 직원이든 똥강아지든. 누구나 사람의 내면에는 지시하는 존재가 있고 그걸 따르는 존재가 있다. 둘의 갭이 적을수록, 내가 나의 지시를 찰떡같이 잘 따를수록 좀 더 완성도 높은 인간이 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게 중요한 건 ‘어떻게 하면 내가 어른(사장) 역할을 더 잘할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아이(직원)를 더 잘 다독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더 맞는 거였다. 훈육을 얘기하는 봉태규씨의 글에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힌트를 얻고 나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나는 내게 나쁜 어른이고 못된 사장이었다. 어떤 상태인지 들어줄 생각은 안하고 왜그러냐고 혼만 냈기 때문이다. 내게 필요한 건 4음절로 이뤄진 단순한 문장, “그랬구나”였다. 그랬구나. 내가 OO해서 기분이 엉망이구나. 그랬구나. (OO한 것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구나. 그래, 그랬구나.
사실 ‘그랬구나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여럿 읽은 기억이 있다. 심리학 책들이었고, 다들 조금씩 변용한 방식이긴 했지만 원리는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그걸 실천하지 못한 것은, 어쩐지 낯뜨겁고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한테 사근사근하게 ‘그랬구나~’하는 상상을 하면 웃기기도 하고 몸이 배배 꼬였다. 변명을 허용해주는 일은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렇게 할 말 안 할 말 다 들어주다가, 내가 나를 망치면 어떻게 해?
하지만 봉태규 씨의 글을 인용하자면, 나 자신에게 ‘나는 날 이해할 수 있어. 나의 마음을 충분히 들어주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어’라고 알려주는 태도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인생과 혼자서 마주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를 받아들이는 자세’다. 그 순간의 내가 얼마나 엉망이고 후지든, 나는 나를 받아들이고 내 상태가 어떤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주 뜨겁게 분노가 치밀거나, 혹은 땅 끝까지 파고들 기세로 기분이 다운되거나,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무기력해지거나. 다 마찬가지다. ‘대체 왜 이래!?’ 하고 화를 내봐야 해결되는 건 없다. 오히려 악화될 뿐이다. 그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애써 괜찮아지려 발버둥치는 것도, 나아지는데 도움이 될 순 없다. 그건 내가 나의 ‘보통 상태’를 100점으로 두고, 그 점수에 못 미친다고 억지로 끌어 올리려 하는 폭력적 행위가 될 뿐이다.
자체적으로 실험한 결과(?) 내가 나와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기술, 더 나아가 내가 나와 더 잘 지내기 위한 ‘그랬구나’의 기술은 꽤 효과가 있었다. 마음이나 몸의 상태가 변화하면, ‘그랬구나’ 기술로 다독이고 인정한다. 감정에 매몰되어버리지 않게 그랬구나, 그랬구나, 반복하면서 충분히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나서 마음 속 아이와 함께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나 찾아본다. 그것을 한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포인트는 재빠른 일정 수정과 계획 조율이다. 몸 상태,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건강할 때 세웠던 계획과 목표들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자책해서 될 일이 아니다. 오후 시간으로, 내일로, 다음 주로 필요한 일정들을 재분배해주면 된다. 그렇게 시간을 좀 주면 몸도 마음도 왠만해서는 나아진다. (쉽사리 나아질 일이 아니면 대대적 조정이 필요한데, 의외로 그런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깨달았다. 여태 내가 나를 망치고 있었구나. 내가 나를 몰아세워서 매번 벼랑까지 다녀왔구나. 그랬구나, 한 마디면 될 것을…. 효과가 좋아 요즘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랬구나의 기술을 써보고 있다. 뭔가 심리 상담자의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과는 그냥 그렇다. 다들 마음 속의 아이를 타인에게 내보이기 쉽지 않은 탓이겠지. 아니면 애 같은 건 나 뿐인 건가!? 그러고보니 봉태규씨 아이인 시하 나이는 다섯살인데, 30대 중반인 나의 내면의 아이가 아무래도 나이를 너무 안 먹은 것 같기도 하고. 끙.
작가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