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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아론 May 14. 2019

나는 정말 나를 잘 알고 있을까?

습관적으로 떠올렸던 문장들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갇혀버렸을까.


후배 J와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한참 수다를 떨던 날이었다. 나보다 먼저 퇴사를 하고 플로리스트의 길을 선택한 그녀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한참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폭풍같은 수다 사이에 잠깐 침묵이 고였고, 후배가 대뜸 ‘이상한 말’을 했다. 

“그래도 선배는 대단해. 나도 선배처럼 뭔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진짜 끈기 없는데.” 


나는 그말이 진심으로 이상하게 들렸다. 평소 칭찬봇인 J이긴 하지만, 얘가 나를 놀리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정말 변덕이 심하고 끈기가 없다. 집중력도 약하다. 한 우물을 못 파고 이것 저것 첨벙대기 일쑤다. ‘대신 호기심이 강하지’라며 그런 나를 위한 그럴싸한 변명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후배가 하는 말은 달랐다.


“선배는 에디터라는 직업으로 10년 가까이 회사를 다녔잖아.” 

“에이, 그건 직업이였으니까 그렇지.”

“조향도 계속 공부하고 있고.” 

“그러게, 공부만 하고 있어서 큰일이다. 얼른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야할텐데.”

“그리고 글! 글도 꾸준히 쓰고 있잖아. 어제도 썼고!” 

“글쓰는 건 항상 하는 거니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후배는 계속해서 맞는 말만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우기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것 저것 하긴 하는데, 내가 뭐 하나에 몰입해서 꾸준히 하는 건 아니라서….” 하고 말끝을 흐렸더니 후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조금씩 꾸준히 하는 사람이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금씩 꾸준히 하는 사람. 내 앞에 ‘꾸준히’라는 말이 붙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덕이 심하고 끈기는 없지만 호기심은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규정해왔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어떤 범주 안에 넣어 이해하려는 건 굉장히 게으른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애정은 있고, 이해는 하고 싶은데 이해하기 힘들거나 그럴 만한 에너지가 없을 때, 우리는 상대를 쉽게 스테레오 타입화 시킨다. 나 또한 타인에게 자주 범한 잘못이고, 그에 대한 아픈 기억도 있다. 


몇년 전 부산, 매년 부산 국제영화제에 함께 취재를 핬던 후배 S와 길고 긴 영화 관람 끝에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영화제 취재는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연속으로 4-5개의 영화를 보고, 그걸 정리하고 기억해야해서 녹록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다양한 감정을 다루는 영화들을 계속 접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깊은 얘기를 하게 되는 일도 많다. 그날도 그런 밤이였다. 지친 걸음에도 쉴 새 없이 대화를 하던 와중에 후배가 그런 말을 했다.


“선배는 그런 말을 많이 하시잖아요. 너는 어떤 스타일이니까~ 혹은 너는 어떤 타입인 거 같아~ 하는 말들이요.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요. 선배 나름의 이해하려는 노력인 건 알겠는데 사실 틀릴 때도 많거든요, 선배 말이.”


앞선 대화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저 말만은 여전히 생생한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보다. 세심한 노력 없이 후배들을 이해하려 했던 말들, 내 딴에는 노력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일종의 폭력이였단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애정이 없었다면 그런 말도 그런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정이 있어서, 그래서 더 위험한 말, 그리고 마음.


그러고보면 가깝다고 생각할수록 오히려 서로를 모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부모 형제 같은 가족과의 관계가 그렇다.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나 자주 하는 행동들로 가족 사이에서 각자 위치나 성향은 ‘이미’ 판단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고정된 관계를 지속하게 되면 서로를 상처내기 쉽다. 그러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인 판단이 관계를 망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습관적으로 판단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닐까. 내가 나를 제일 잘 알지. 그러면서 왜 ‘나는 첫째니까’ ‘나는 딸이니까’ ‘나는 선배니까’ ‘나는 OO이니까’하고 수도 없이 많은 굴레를 스스로 세웠다. 내가 가진 역할, 위치, 성향에 따라 나를 쉽게 판단하려 했다. ‘나는 끈기가 없으니까’ ‘나는 호기심이 많으니까’ ‘나는 유혹에 약하니까’…. 습관적으로 떠올렸던 문장들 속에 얼마나 많은 내가 갇혀버렸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찔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나’라고 믿었던 직업과 직급과 위치를 모두 풀어헤치고 나서, 나는 그동안 나라고 믿었던 많은 부분들이 한시적이였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과거는 내가 흘러온 궤적일 뿐,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미래의 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계속 변화하게 될 삶 속에서 나에게만은 조금 더 예민한 사람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어야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힘에도 섣부른 판단이나 범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을 테지. 나를 향하든 타인을 향하든, 언제나 애정을 갖는 일이란 이렇게나 번거롭고 마음이 많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귀하고 필요한 일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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