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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진소라 Sep 19. 2022

싫기만 한 사람

나의 인생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 몇 안 되는 싫기만 한 사람

 이 주제에 대해 쓴다고 생각한 이후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싫기만 한 사람에 대해 잠깐 떠올리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밀도 높게 가득, 그 사람을 다시 머리에 채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용기 내어 묵혔던 생각을 끄집어내어 보기로 한다.

 이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원픽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신입사원 때 만난 팀장님이다. 그녀는 참 재빠른 사람이었다. 조직개편이 한 번씩 찾아오는 연말, 본부장이 바뀔 때면 늘 새로운 본부장에게 선물을 선사했다. 대표적인 게 캐시미어 목도리였다. 겨울이라는 시즈널리티도 고려하면서 캐시미어라는 단어가 주는 은근한 고급스러움까지 겸비했으며 선물 받는 이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선을 지킨 딱 적당한 품목, 그래서 캐시미어 목도리. 아 물론, 그녀 나름의 기준에 따라 권력이 있어 보이는 이만 이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뿐만이 아니었다. 본부장이 술을 좋아하는 타입이라면 그녀는 그분의 댁까지 찾아가서 낮부터 함께 술을 거나하게 마시곤 했으며 본부장이 다른 누군가와 밖에서 술을 마시는 날이면 대리기사를 자처하여 직접 운전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이렇게 윗사람을 열심히 사랑하는 만큼 아랫사람에게도 똑같이 사랑을 강요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같은 본부 사람들이 하나 둘 퇴근을 하고 어느덧 우리 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오후 9시의 사무실. 그날따라 선배의 일이든 나의 일이든, 굳이 찾아서 할 일이든 아니든, 할 일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게다가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른 본부장도 일찍이 술을 마시러 간 건지 자리에 없었다. 나는 파트장과 팀장이 퇴근하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주섬주섬 가방을 싸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타자 소리 없이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의 선배들도, 절전모드가 될락 말락 갸웃거리던 나의 노트북도, 어느새 불빛이 하나씩 꺼져가던 적막한 사무실도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누군가 이 정적을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퇴근해보겠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적막은 그렇게 와장창 속절없이 깨져버렸고 그 순간 모든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선배들의 눈에는 '그래, 너라도 가'라는 체념과 약간의 야속함, 그러면서도 후배를 향한 응원의 눈빛이 서려있었고 파트장의 눈에는 '그러든지 말든지, 바빠서 이만'이 느껴지는 단호하고도 선을 긋는 듯한 눈빛이 차있었다. 그리고 팀장의 눈에는 입 밖으로 나온 말과 똑같은 눈빛이 들어차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언니들 야근하는데 신입이 혼자 집에 가네?"였다. 정시퇴근을 한 것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해서 일어난 거였는데. 그럼에도 그 날은 팀장을 만류하는 파트장 덕분에 그때 바로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걸까' 시계만 쳐다보며 자리에 앉아 하릴없이 기다리는 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내가 아니더라도 아랫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싫은 소리 한마디씩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 와중에 팀에서 가장 예쁨 받는 막내인 나에게 가장 많은 '한 마디'를 던졌는데 그게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 이렇게 문단이 되고 한편의 글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튼 그녀는 나를 어여삐 여기는 동시에 나를 짓눌러 부러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치사하게도 나의 외모나 옷차림에 대해 지적하곤 했다. 와이드 팬츠를 즐겨 입던 나에게, 그런 옷을 입으면 너무 편해져서 살이 찐다며 조심하라고 당부하기 일쑤였다. 어느 날엔 화장실에서 내 허리에 손을 둘러 허리 사이즈를 재는 듯하더니 "살이 좀 쪘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남이사 살이 찌든 무슨 옷을 입든 무슨 상관이람 싶으면서도, 신입사원으로서 (보이스피싱까지 당해서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옷이나 사주면서 말하지'하고 속으로 생각했던 날이 많았다. 그런데 입이 방정이지, 진짜로 옷을 선물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 1층에 있는 편집샵에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옷을 한벌 사주고 싶다면서도 그놈의 와이드 팬츠가 꼴 보기 싫었는지 오로지 바지류만 들춰보는 그녀였다. 그러더니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하이웨이스트 세미 와이드 팬츠를 고르는 것이 아닌가. 그녀 입장에서는 나름 나의 취향을 고려해 타협점을 찾은 듯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사이즈였다. 미디엄 사이즈도 시원찮을 판에 재고가 없다고 해서 스몰 사이즈를 사준 것이 아닌가. 누가 봐도 내가 입을 수 없는 사이즈의 바지를 20만 원에 사주면서 "회사에 한번 입고 와봐"라고 하던 그녀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다시금 곱씹어보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명쾌하게 답이 내려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이겨먹으려고 늘 발버둥 치던 그녀가 이제는 안쓰럽다. 그런 어리숙한 그녀의 말들에 있는 힘껏 상처받아온 나의 영혼 또한 안쓰럽다. 싫기만 한 사람에게서 '그럼에도 괜찮은 점'을 찾을 수 있다고 건방지게 믿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그녀와 함께 회사에 앉아있는 1분, 아니 1초, 아니 0.000000001초가 버겁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때 도망치길 잘했다고, 오늘의 이 글을 통째로 함께 바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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